평소 '작품성 있는 영화'라고 칭찬받는 작품들을 '영화제용 영화'라며 아예 취급을 안 하던 마나님이 "'파주' 언제 개봉하지? '파주' 좀 보러 가자"고 할 때부터 '아, 이 영화가 한 건 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주'에 대한 평 중에는 좀 유치하다 싶은 '아름다운 불륜' 류의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형부와 처제라는 '공식 불장난 우려 관계'를 바탕으로 진짜 인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박찬옥 감독이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들 때 '확 깨게 만드는' 솜씨는 이미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익히 본 바가 있었습니다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는 서우의 영화입니다. '미쓰 홍당무'에 이어 이 배우에게 두번째로 놀랐습니다.
한창 도시로의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파주. 3년 전 '대학 입학금을 들고 인도로 날아갔던' 은모(서우)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형부 중식(이선균)을 다시 만나지만 둘 사이에는 편안하지 않은 긴장이 흐릅니다.
8년 전, 중식은 구속된 운동권 선배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선배의 아내이자 자신의 첫사랑인 자영(김보경)과 불륜에 이르게 되지만 산 같은 죄책감만 안은 채 서울을 떠나 파주로 도피합니다. 거기서 공부방을 운영하다 반 아이들 중 하나인 은모의 언니, 은수(서이영)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짜여진 세 사람의 가족의 행로는 순탄치 않습니다. 은모의 가출과 은수의 죽음, 그리고 형부와 처제가 함께 사는 삶. 그런 곡절을 안고 돌아온 은모는 언니가 죽은 이유를 궁금해 하기 시작합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설악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오른쪽 등산로 밖으로 난 길 아래가 천길 낭떠러지일지도 모른다는 스릴도 짜릿했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웃 봉우리를 보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천년 전쯤으로 와 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파주'는 짙은 안개 속에서 은모가 파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안개 속'은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살을 맞대고 살아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파주'는 DIY 영화입니다. 완성품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민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대체 왜 중식은 저기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걸까. 대체 왜 은모는 사과는 안 하고 엉뚱하게 저 말을 하는 걸까.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생뚱맞다'고 하는 중식의 '고백(?)'은 왜 나오는 걸까.
얼마 전 '선덕여왕'을 보다가 '대체 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카메라가 오지 않을 때에는 서로 대화도 안 하는 거냐'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극이 실제 인물들의 삶을 비쳐주는 거라면, 모든 캐릭터는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삽니다. 극은 그중 가장 중요한 장면들을 돌아다니면서 비추죠. 즉 모든 캐릭터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때에도 뭔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시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캐릭터들은 카메라 앞에서만 모든 의미있는 행동을 하고, 카메라 밖에서는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비치지 않을 때에는 전원이 꺼진 인형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죠.
하지만 '파주'의 등장인물들은 카메라의 프레임 밖에서 너무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에 비치지 않은 부분은 관객이 추측하고, 영화의 빈 자리를 관객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메꿔야 합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질색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대로 따라 간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이야기'가 수백 페이지 분량의 텍스트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이 귀찮은 관객에게 이 영화는 생뚱맞음의 연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작업 자체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뚫고 들어가는 모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날라리가 어느날 갑자기 종교철학이니 사회복지학이니 하는게 어처구니없다'고 하기도 하고, 이 영화에 나오는 몇몇 장면들이 '너무 뜬금없어서 어처구니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객들에게 '파주'의 뜬금없음과, 재벌집 아들인 남자 주인공이 가난한 집 출신의 여주인공에게 따귀 몇대 맞고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면서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식의 '뜬금없음'은 전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길 바라는 게 무리일까요.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공은 배우들에게 돌려야 할 듯 합니다. 어찌 보면 운명(?)에 질질 끌려 다니는 비운의 남자 주인공 역을 이선균이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이만한 반향을 일으키는 건 쉽지 않았을 듯 합니다. 아내 역의 심이영과 평생의 로망인 선배 역의 김보경(무슨 특별출연이 이렇게 비중이 크단 말입니까^^) 역시 기대 이상의 호연입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힘은 서우에게서 나옵니다.
서우가 연기한 은모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캐릭터입니다. 흔히 기성세대가 10대들을 보고 "대체 요즘 너희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니?"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저 '한심하다'는 뜻을 넘어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은모는 비논리와 즉흥성, 즉물성의 상징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생각과 행동이 흔히 엇나가기 마련인 사춘기의 방황과 속단이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외계인처럼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캐릭터를 서우가 연기하면서, 관객들은 '그래. 저런 캐릭터가 실제로도 있었지', 혹은 '나도 저런 때가 있었어'라고 납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불가해한 캐릭터를 납득이 가게 만드는 힘, 아마 이런게 배우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의 서우는 어딘가 '와호장룡'에서의 장자이를 연상시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연기를 만들어 낸 것이 배우 혼자만의 힘일 리는 없습니다. 박찬옥 감독의 디렉션이 서우와 맞아 떨어진 결과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서우의 앞날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철거민들의 투쟁 장면과, 중식이 운동권 출신의 활동가라는 점이 이 영화를 짐짓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지만 정작 이 영화의 고갱이와는 별 상관 없는 부분들입니다.
플롯상에는 몇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그리고 이런 부분은 제가 평소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주'의 울림은 영화를 본 다음날까지 지속됩니다. 겉으로 잔잔하게 보이는 수면 속에서 엄청난 격랑이 일고 있는 광경을 감지해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파주'는 절대 심심한 영화가 아닙니다. 어쩌면 올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가 될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P.S. 늦은 밤이었지만 객석은 꽤 많이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오는 관객들 중 상당수가 '낚였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위 화보를 비롯해 '안된다고 하니까 더 갖고 싶어졌다'류의 홍보 문구를 생각하면 그 분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네. 형부와 처제의 짜릿하고 자극적인 불륜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그냥 집에서 비슷한 제목의 야동을 보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P.S.2. 은모가 중식에게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거에요. 어떤 의미에요?'라고 물을 때 중식은 '젊었을 땐 ....했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계속 일이 생겨'라고 대답합니다. 중식은 영화 속에서 66년생. 박 감독은 68년생입니다. 말하자면 '불혹에 맞은 미혹'인 셈입니다. 문득 80년대생 젊은이들이 이 영화의 함의를 모두 읽어내길 기대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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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밥'이었지만...? ---> 오타겠죠? 그나저나 정말 21세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군요. ^^
지적 감사합니다. 그런데 21세기의 첫 decade가 끝나가는 마당에 무슨 새삼스런 말씀을..
박찬욱 감독은 63년생입니다.
아직도 박찬'옥' 감독을 무시하는 분들이 계시군요.^^
그런데 박찬욱감독 따님이름이 "서우"랍니다. ㅋㅋ
해외에선 박찬욱-박찬옥 무지 헷갈릴듯.
문득, 어느 날 주말에 방에서 뒹굴다가 무방비상태로 만난 영화 중에서 의미있게 다가오는 영화들이 있었습니다..박종원 감독의 '송어'가 그랬고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그랬습니다.
'파주' 같은 류의 영화는 포스터만 보고 불륜으로 오해하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으나 굳이 찾아가서 보기보단 우연히 만나고 싶은 영화 같습니다. (사실 제 스스로가 뭔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는 초반 몰입에 부담을 많이 가지는 스타일이라서요..)송기자님의 글을 보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데요..
그나저나 월요일 광고촬영이 있는데 주제넘게 제가 조연으로 출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짧은 연기지만 고민이 많이 됩니다..ㅋㅋ 나중에 광고 보시고..맘껏 웃어주시길..
좋은 영화와 머리 아픈 영화의 차이가 바로 그 '몰입'이 쉽냐 어려우냐의 차이겠죠. '파주'는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무 잘 어울리실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중에 한번(저 출연료 쌉니다).
DIY영화. 즉 영화 보면서 정신노동 하란 말씀이군요. ㅋ
서우의 독사진, 왠지 강문영씨와 이미지가 비숫하네요.
요즘 이민정이란 배우를 보면 흡사 예전의 원미경씨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굿바이 프레지던트' 보면서 박근형씨의 중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인사 하자마자 헤어지고 싶으셨나요~ 굿바이~~~ㅎㅎ
장진감독 보시면 서운하시겠어요 ^^
'미치도록 그리웠고 죽을만큼 사랑했다' 영화 '중독'의 카피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중식의 마지막대사가 자꾸만 자꾸만 맴맴...
'은모는 끝까지 모르는게 좋겠어요'
서우라는 배우의 연기가 돋보였던 이유는
그것을 이끌어 낸 감독의 역량이란 생각이 듭니다.
곰곰히 다시금 곱씹게 되는 영화 '파주'.
1. '이브의 건넌방'과는 소재만 비슷할 뿐 많이 다른 영화인가보네요
2. "카메라가..대화도 안하는..." 부분에서, 소설에서긴 하지만, 소설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등장하는 대목이 끝나면 (독자가 그 부분을 읽어주는 경우죠) 휴식시간이라 딴 짓하며 자기들끼리 놀고 그러던 소설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런 소설이 있었나?
'제인에어 납치사건' 으로 재미를 본 작가는 기본적 설정을 유지하며 후속작 4,5편을 계속 써내려가는데, 그 설정에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딴 짓하며 노닥거리는 상황이 많이 다루어집니다.
아... 그 후속작들도 한국어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ㅡ.ㅡ;;
뭡니까, '굿모닝 (장동건) 프레지던트' 와 비교해서 차이나게 느껴지는 정성과 애정어린 이 포스팅은!!?
;;;
다음 모임에... 서우 양 데리고 나와주세요..-_-;
보고 싶어요.
반딧불 모델로 캐스팅하는게 빠르겠소.
전 탐나에서 서우씨를 보고 관심이 차에 인터넷에서 티저예고편으로 홍보하는 걸 보고 갔었는데요. 처음엔 홍보문구랑 좀 달라서 '뭐지?'하는 느낌으로 봤다가 중후반으로 가서는 '알겠다!!'하는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마지막 서우씨의 다채로우면서도 안다채로워보이기도 마지막표정때문에 '알겠으면서도.....잘 모르겠어!'한 느낌으로 나왔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생각나고 한 번 더 보고 싶더라구요. 이게 위에서 언급하신 '몰입'되는 생각하는 영화의 힘!!이겠죠?
P.S.정말 파주를보고 '생각하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저 또 보러가염!!)
'관심이 가던 차에'인데 이 곳에 댓글을 오늘처음 달아봐서 비밀번호를 안달아서 수정이 안되네요...
'다채로우면서도 안다채로워보이기도 한 마지막표정' 이런게 정말 불가해한...^^
'질투는 나의 힘' 아닌가요..?
'복수는 나의 것'과 혼동하신 듯..
박찬옥, 박찬욱..
이름도, 영화 제목도 상당히 비슷하군요..^^a
허거거거걱;;; 이런 실수를. 감사합니다.
서우씨 앞날이 기대되는 여배우인것 같습니다..
파주는 와이프가 내용을 대략 듣더니만 이건 뭐여 하더군요
저는 듣는 순간 중딩 시절 봤던 불량 3류 에로 만화를....
어찌해서 좀 볼까 고민중입니다만 늘 그렇듯 고민만 하다
끝나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서우씨, 저도 좋아하지만...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세요?
글에 야동 머 이런 이야기 나오니까-0- 답글도 저런게 달리네요;;;
저와 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저런 여배우가 한국에 있다니.. 넘 좋다...는 생각을... 했음... 울 나라 사람들은 여배우나 여가수에 넘 박함... 감성까지 유고 전통에 지배당하는 불쌍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