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미실 시대의 '선덕여왕'에서 제작진은 눈여겨 볼 부분 중 하나로 '김유신의 복권'을 꼽았습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불패의 명장인 유신의 면모를 살려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덕여왕' 52회에서는 뭔가 선봉대장으로의 면모를 갖춘 듯한 고도와 함께 턱수염을 기른 유신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상으로 '첫 승리'를 기록한 유신의 직위가 상장군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는 드라마이다 보니 갑자기 유신이 승리를 거두는 상승장군이 된다 해서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김유신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정사에서 김유신의 전공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630년(진평왕 51년)의 낭비성 전투입니다. 이때 기록은 이렇습니다.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 正, 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 或 旗. 諸軍乘勝, 鼓 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유신이 신라군의 사령관이 되기 전, 일개 비장이던 시절에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격했다'는 첫번째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김유신의 뒷날 전투 기록을 살펴보고 "참으로 모질고 독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유신의 전투에서는 드물지 않게 최측근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비녕자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유신의 낭비성 전투와 비교할만 합니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어렵게 싸웠고 마침내 기력이 떨어졌다. 유신은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화랑의 감투정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예화입니다. 사실 선덕여왕 연간에 신라는 백제에게 수세로 전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 원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김유신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이때 비녕자에게 "네가 나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들끓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비슷한 사적은 먼 뒷날, 황산벌에서 계백과 대치한 김유신의 군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결사대에 연거푸 패해 군심이 흔들리자 자신의 친 조카인 반굴(유신의 동생 흠순의 아들)과 역시 조카뻘인 관창을 희생시켜 전군을 격동시킵니다.
('선덕여왕'에는 흠순이 나오지 않는 대신 월야가 의동생 역으로 나오고 있죠.)
총사령관의 동생인 흠순이 반굴에게 말합니다. "신하된 바로는 충성이 제일이요, 아들된 바로는 효도가 제일이다. 이날 우리가 위기에 처했으니 목숨을 버리면 충효를 모두 갖추는 것이다(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이 말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립니다.
화랑들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맹을 과시하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을 수 있겠지만 그 뛰어든 사람은 십중팔구는 죽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다 해도 수천 수만의 적군과 혼자 대치하면 죽음을 피하기 힘듭니다.
유신과 비녕자, 반굴과 관창을 비교해 볼 때 기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유신은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죽었다는 것 뿐입니다. 이 말은 유신 역시 낭비성에서 적진으로 침투할 때에는 역시 비녕자나 관창과 같은 운명이 될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도구로 던질 각오가 있었던 사람이 장군이 되고, 그런 장군인 만큼 휘하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의 리더십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불행히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런 배경을 찾아 볼 수는 없겠습니다. 이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고 유신은 상장군이 됐지만, 그의 휘하 장병들이 그를 믿고 따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이미 고위 장성이 되기 전에 그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란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생략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신이 명장이 된 것은 일신의 용맹보다는 빼어난 지략과 정략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후세로 갈수록 김유신의 면모에선 지장의 면모가 풍겨나옵니다. 어쨌든 김유신을 '선덕여왕'에서 빛나는 캐릭터로 키워내기 위해선 필수적인 부분이 생략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P.S. 미실이 하는대로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여왕마마께서는 안 늙는 비법도 그대로 물려받으셨습니다. 유신과 알천, 월야가 수염이 시커매지고 설원과 미생은 노인이 됐건만... 참고로 드라마 '선덕여왕'의 설정을 따를 때 이 시기의 선덕여왕은 60세 전후입니다. (자꾸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네 하는 분들, 이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이 드라마의 설정에 따를 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선덕여왕' 52회에서는 뭔가 선봉대장으로의 면모를 갖춘 듯한 고도와 함께 턱수염을 기른 유신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상으로 '첫 승리'를 기록한 유신의 직위가 상장군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는 드라마이다 보니 갑자기 유신이 승리를 거두는 상승장군이 된다 해서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김유신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정사에서 김유신의 전공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630년(진평왕 51년)의 낭비성 전투입니다. 이때 기록은 이렇습니다.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 正, 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 或 旗. 諸軍乘勝, 鼓 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유신이 신라군의 사령관이 되기 전, 일개 비장이던 시절에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격했다'는 첫번째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김유신의 뒷날 전투 기록을 살펴보고 "참으로 모질고 독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유신의 전투에서는 드물지 않게 최측근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비녕자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유신의 낭비성 전투와 비교할만 합니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어렵게 싸웠고 마침내 기력이 떨어졌다. 유신은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화랑의 감투정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예화입니다. 사실 선덕여왕 연간에 신라는 백제에게 수세로 전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 원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김유신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이때 비녕자에게 "네가 나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들끓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비슷한 사적은 먼 뒷날, 황산벌에서 계백과 대치한 김유신의 군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결사대에 연거푸 패해 군심이 흔들리자 자신의 친 조카인 반굴(유신의 동생 흠순의 아들)과 역시 조카뻘인 관창을 희생시켜 전군을 격동시킵니다.

총사령관의 동생인 흠순이 반굴에게 말합니다. "신하된 바로는 충성이 제일이요, 아들된 바로는 효도가 제일이다. 이날 우리가 위기에 처했으니 목숨을 버리면 충효를 모두 갖추는 것이다(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이 말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립니다.
화랑들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맹을 과시하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을 수 있겠지만 그 뛰어든 사람은 십중팔구는 죽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다 해도 수천 수만의 적군과 혼자 대치하면 죽음을 피하기 힘듭니다.
유신과 비녕자, 반굴과 관창을 비교해 볼 때 기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유신은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죽었다는 것 뿐입니다. 이 말은 유신 역시 낭비성에서 적진으로 침투할 때에는 역시 비녕자나 관창과 같은 운명이 될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도구로 던질 각오가 있었던 사람이 장군이 되고, 그런 장군인 만큼 휘하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의 리더십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불행히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런 배경을 찾아 볼 수는 없겠습니다. 이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고 유신은 상장군이 됐지만, 그의 휘하 장병들이 그를 믿고 따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이미 고위 장성이 되기 전에 그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란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생략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신이 명장이 된 것은 일신의 용맹보다는 빼어난 지략과 정략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후세로 갈수록 김유신의 면모에선 지장의 면모가 풍겨나옵니다. 어쨌든 김유신을 '선덕여왕'에서 빛나는 캐릭터로 키워내기 위해선 필수적인 부분이 생략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P.S. 미실이 하는대로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여왕마마께서는 안 늙는 비법도 그대로 물려받으셨습니다. 유신과 알천, 월야가 수염이 시커매지고 설원과 미생은 노인이 됐건만... 참고로 드라마 '선덕여왕'의 설정을 따를 때 이 시기의 선덕여왕은 60세 전후입니다. (자꾸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네 하는 분들, 이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이 드라마의 설정에 따를 때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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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57화 (조정우 연재소설)
Tracked from 조정우2009/11/18 14:46환권왕자는 고구려의 사신으로 신라의 덕만공주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달한 양만춘이 돌아오자 물었습니다. "양만춘 장군, 덕만공주를 만나보았소?" "태자 저하, 소신이 덕만공주를 만나보니, 덕만공주는 절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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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보고있지 않지만, 송본부장님의 글은 항상 애독하고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남은 한해도 건승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챙겨 보시기 쉽지 않겠죠.^ 네. 감사합니다.
새치기 일등!! 헐;;
앗싸...1등
z
다읽고 일등이라고 썼더니...........
3등이군요
^^;;
이제 뭐 선덕여왕에서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그런거는
기대 안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판타지 SF물 보는 느낌이랄까?
ㅋㅋㅋ
그럼 스스로 정한 설정 안에서의 흐름이라도 매끄러워야 하는데, 자꾸만 억지에 억지가 겹쳐져서...^
완전한 픽션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사극은 실제 사기에 의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우리역사 제대로알기..의 몫이 둘 다 필요한 장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하. 그렇죠.
글을보다 "관창"이란이름이 눈에 들어오네요...
예전에 관창이란 노래가 있었는데...
관창 관창 관창을 잊지말자...
신라 화랑도에 으뜸소년 나라위해 목숨 바쳤네...
그의나이 겨우 열여섯 관창을 잊지말자....
대충 가사가 이랬던듯싶은 노래... ^^
국민학교 도덕책에 '사다함과 관창'이란 단원이 있었던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그런 노래도 있었군요.
저도 '관창을 잊지말자'라는 후렴구가 생각납니다.
찾았습니다.
http://cafe.naver.com/6u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6
죽을 가능성이 높은 소모품적인 비정규직(돌격대장)의 시절을 버텨 내면 안정적인 정규직(상장군)이 되는 구조는 나름의 386 잔당의 진보사관을 표출하고 싶어 안달인 작가진이 그닥 좋아할 비전이 아닌듯...
대중에게 이해하기 쉬우라고 중국의 저술가 린위탕 같은 경우에는 <측천무후>를 쓰면서 아예 고대 관직을 현대식 직명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상장군"은 고려시대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변변치않은 역사지식이 오히려 드라마 시청을 방해하는 것인지...
그리고 비령자 이야기에서 "激"은 "격려하다"도 좋지만, "격동시키다"가 더 좋을 듯 함.."격려하다"는 이미 당사자의 마음이 움직인 상태에서 더 힘을 내라고 북돋아준다는 의미라면, "격동시키다"는 마음이 위축되고 주저주저한 상태에서 움직이도록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를 갖는 만큼, 비령자 이야기에 더 맞는 해석일 듯 함..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상장군이 신라때 대장군의 아래 직위였다네요.
진정으로 민중을 생각하던 개혁의 표상이던 선덕여왕이 왕위를 얻자마자 중정을 연상시키는 무소불위의 정보기관으로 철권통치를 시작하며 더우기 박통이 즐겨쓰던 파워기관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용한 통치를 활영하는 등 이제 정신이 다 없네요. 슬슬 엠본부가 즐겨쓰는 '막장을 이용한 시청률 유지 전략'이 시작되는 것인지 에효네요.
'미실을 닮아가는 덕만'이란 의도를 혹시라도 시청자들이 눈치채지 못할까봐 너무 열심입니다.
"개혁이란 항상 위로부터여야 한다." 으하하.
차라리 드라마 제목을 선덕여왕으로 하지 말고 "신라 왕실을 뒤흔든 요부 미실"정도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미실과 비담이 활약하고..
덕만과 유신은 너무 병풍(?)역할만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ps내용 잼나네요 ㅎㅎ
그러게요.
저도 선덕여왕에 대해 많이 연구했는데...
선덕여왕은 김춘추하고 나이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조건 천명공주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아요.지귀설화를 보면 선덕여왕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50이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지요.
모란꽃 이야기도 선덕여왕이 모란꽃을 향기에 대한 예측을 했을 때가 40이 넘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아요.
트랙백 걸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선덕여왕이 실제로 몇년생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단지 이 드라마의 앞부분에서 진평왕 즉위와 선덕여왕의 출생이 같다고 설정한 것을 갖고 말한 것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선덕여왕과 김춘추가 나이가 비슷한 것이 아니고 김춘추의 부인 김용춘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잼나게 잘읽었습니다... 언제나 최상의 연기자만이 연기를 할수 없는것... 부족함이 있어도 조금씩 나아져 다음 작품에서는 좀더 나은 모습을 보일수 있다면 오늘의 부족한 연기력에 도움이 되지않을까 생각을 하네요... 여하튼 사극이니...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g
이미 판타지가 되어버린 선덕여왕에게 대규모 전투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보이네요 이런거때문에 최수종이 나오는 kbs사극이 생각나는듯-.-; 단순해 보이는 유신때문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은데 대규모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조명함으로써 순식간에 팬층을 형성할수도 있을텐데말이죠(이전에 알천처럼요)
하하
하하 정말 동감. 미실한테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는지 다른 캐릭터는 정말 소홀했던것이 미실이 떠난 지금에야 속속들이 드러나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시청률이 곤두박질치죠. 미실이 안 나와서 시청률이 떨어지는게 아니라, 미실외의 다른 캐릭터에게 그다지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덕만이는 철저히 미실의 수제자로서 미실 워너비가 되고 싶어하는거 같은데 미실이 아닌한 미실을 뛰어넘을 수 없을것이니 내내 병풍일것이고, 실제 등장인물중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춘추나 유신의 경우 초반에 너무 디테일없이 약하게 그려져서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설득력을 얻긴 힘들거 같고 , 남은건 그나마 미실의 아들로써 미실의 후계자나 다름없이 꽤나 공을 들여 인기를 모은 비담의 캐릭터에 의존할텐데. 이거 뭐 안봐도 망할게 보이는데요. 절대로 비담은 미실만큼의 정당성과 설득력을 주지 못할겁니다. 사랑을 위해 찌질하게 난을 일으킨 이와 다수의 악행을 저지르지만 신라라는 나라를 품고자 했던 나름의 대의가 있었던 미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여러모로 안습입니다. 그러게 진작 좀 균형갖춘 인물묘사를 했어야 했다는.
제작진이 힘을 실어 준 캐릭터는 미실과 비담,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죽방뿐입니다. 이 정도가 이번 제작진의 한계인 듯.
그렇겠네요...
미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다른 캐릭터들 상대적으로 죽이고 있었는데...
미실이 떠난 지금에서야 지금까지 죽이던 캐릭터를 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
미실이 양날의 칼이었군요...날카로운 시각에 박수 짝짝짝
제가 대본을 챙겨보다 말아서 몇 회에서 몇회까진지 정확히는 모르나 대본 지문에도 덕만대사에 미실처럼 냉정하게 미실처럼 ~한 표정으로,미실처럼 딱 딱 끊어서라고 써있을 정도니 말다했죠.
미실과 덕만은 엄연히 다르고 배우 또한 연기력의 스타일이 다른데 그것을 보고 너무한다 싶더군요.
선덕여왕이 아무리 역사논란이 있다해도 재미있었고 연기자들의 캐릭도 다들 매력이 있었는데 덕만을 미실처럼 만든후부터 재미가 점점 떨어지던군요.
그나저나 김남길이 신종플루에 걸렸다니 선덕여왕 시청률에 영향이 엄청나겠는걸요. 미실도 없는데..
삼 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대야성및 40성을 빼았겼다고 하는데 히틀러의 전격전이 아닌이상 40성과 대야성이 빼앗길 동안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테고 분명히 신라가 그걸 막을려고 자국의 유능한 장수인 김유신, 알천, 필탄이 투입되지 않을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40성이 빼앗길 동안 신라가 가만히 손빨고 있을리가 없죠!
더구나 진흥왕, 진평왕시대에서 고구려 백제가 전투할때 가야계인 김무력, 김서현이 전투에 빠진 적이 거의 없고 김유신의 낭비성의 전과를 생각하면 반드시 40성 전투에 참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첫 패전이 의자왕의 40성 함락전이라고 생각되구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한달 사이의 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의자왕 2년 7월의 일이죠. 8월에는 다시 전투를 벌여 대야성을 함락시킵니다.
"성"이라는 단어를 듣고 어떤 성을 생각하셨나요?
요즘 우리가 보는 남한산성?, 수원 화성?
아니면 역사속의 큰 성들...
몇만명 적어도 몇천명이 얽히는 성들을 떠올리셨겠죠.
그런데 겨우 200여명이 주둔하는 작은 성(?)들도 많았던거죠.
삼국시대니까.
송원섭님 말씀대로 한달사이의 일이니까...
전령이 오가고 김유신이나 알천급 장수들이 나가야될 싸움인지 판단하고, 병력 소집하고... 출진하려면 시간이 꽤 걸렸죠.
백제가 전면전이 아니라 신라의 반응을 떠보고 중앙군이 나오면 후퇴할 수도 있고, 국지전으로 끝나서 지방군이 막아낼 수도 있는데 중앙군을 대규모로 움직이면 국방력이 낭비되니 신중했을 거구요.
하양까망//
지금 무슨 소리하시는지
무려 한달입니다.
중국이나 러시아같은 거대한 땅덩어리도 아니고 파발마로 보내면 2일이나 3일이면 전황이 다 파악됩니다.
한달이면 충분하게 병력편성해서 보낼수 있습니다.
즉 김유신, 알천, 필탄, 임종, 염장등의 장수가 충분히 출전할수 있죠.
이 한달사이라면 신라의 유명한 장수는 거의 투입했을 것이고 김유신이 패전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죠.
글쎄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전투가 한달도 안돼 끝났으니, 김유신의 패전으로 보려면 늦어도 보름 안에는 출전했어야겠죠.
백제에선 왕이 직접 나왔으니 원정 규모가 매우 컸을 텐데, 기습받은 쪽에서 보름만에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싶네요.
그 다음달에 대야성이 떨어졌고, 김품석이 죽었는데...
김유신이 참전했다면 대야성 방어전에도 참전했을 것이고 대야성이 떨어질때 김유신과 휘하 장수들만 무사할 수 있었을까도 의문이구요.
또, 김유신이 직접싸워서 40여 성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지고, 중요 관문 대야성이 깨졌다면 백제가 왜 거기서 그쳤는지 납득이 안가네요.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공격적인 성향이었는데 신라의 주력 김유신을 크게 이기고, 방어 거점을 깼다면 그 여세로 신라를 궤멸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텐데요.
물론 김유신은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다고 평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대야성 싸움을 전후하여 그도 패전이 있다고 지적하고 싶은 모양인데 전면전이 아닌 지루한 중소규모의 공방전에서 잠시 밀렸다가 결과적으로 되찾게 된 결과를 놓고 사가들이 꼭 역사의 승자인 김유신에게 꼭 패전의 멍애를 씌울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제 사견으로는 대야성전투도 김유신의 승전으로 기록해야 된다고 봅니다.
선덕여왕도 실수를 하고 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인사을 지울 수가 없다.
비담의 역할이다.
비담의 역할이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덕만에게 충성을 하던 그가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서 모든 정황을 팽개쳐 버리고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처음부터 드라마 진행에 대한 확실한 골격을 만든 후에는 그대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이상한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좋은 작가로서의 자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항상 욕심이 사람을 망치는 법이다.
원칙대로 가기를 권하는 바이다.
비담의 난은 선덕 여왕이 나오는 거의 모든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억지 설정은 아닌거 같네요
선덕여왕이 목적이 아닐
김춘추+김유신과의 대결로 보는게 맞습니다.
실제 역사가들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고요
당시 선덕여왕은 고령으로 오늘 내일하고 있었고
그 훨씬 이전부터 후계싸움이 벌여졌는데
비담측이 진거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비담이 반역한거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사실 세력 싸움에서 패배한걸로 보는게 맞는것같습니다.
http://isblog.joins.com/fivecard/557
비담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김유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라마에서 볼수 없다는것이 안타까울수는 있지만, 미실의 시대를 지나 비담의 난이 메인 이슈가 되고 있는데, 굳이 유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드라마의 제목이 "대장군 김유신"이 아니니까요.
비담에 대해서 말이 많은듯 한데, 픽션을 더 섞어 비담이 더 뛰어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모호할 뿐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046935
저 혼자 그러는게 아니고 작가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사 봤는데, 왜보라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 작가는 “미실의 시대로 시작한 드라마는 덕만의 시대를 거쳐, 춘추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끝이 날 것 같다.”며 조숙한 천재인 춘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새 시대의 주인으로 떠오르게 되는지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 이부분이 결론인것 같군요.
이 드라마는 남성이 돋보이면 않된다는 사고가 깔렸거나 아니면 여성이 돋보여야만 하는 드라마이므로 일부러 김유신의 면모에 대해서는 조명을 않하는 것 같습니다.
g
거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겠지요...ㅎㅎㅎ
//holmes
솔까말 타이틀롤이 선덕여왕이고 가장 하일라이트인 즉위식이 진지왕보다 초라하죠.
이거 선덕여왕갤러리에서 난리났습니다.
어째 엑스트라인 진지왕보다 못하나고..
그리고 너무 웃긴게 진평왕보다 역적인 미실이 장례식규모가 더 크죠.
원래 미실의 장례식은 대본에 보면 비맞아가면서 궁상떨면서 미실의 장례를 치루는데 드라마에선 진평왕의 장례식보다 더 화려하죠.
글구 제작비가 없는지 모든 상황을 말로 띄우려는 경향이 있구요.
선덕여왕의 즉위식도 아주 초라하니 김유신도 챙겨줄 여력이 업죠.
전형적인 용두사미의 mbc드라마입니다.
김유신과 계백의 차이점은 ... 제일 중요한게 님들이 논쟁거리인 누가 장수로써 능력이 뛰어났냐가 아닌듯...
김유신은 장수로써 뿐만이 아니라 처세술에도 능했으니까.
춘추와 자신의 여동생을 혼인시키는 대목만 해도 그가 얼마나 술수에 능했나를 알수 있는 부분이고...
예를 들면 계백은 항우에 비견 되겠고.. 김유신은 유방에 비견 되지 않을까...
계백은 너무 충직해서 왕의 잘못된 부분도 고치려 노력한게 아닌 그저 장수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고 김유신의 경우는 모든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군인으로서의 모습뿐만이 아닌 정치가로서의 모습에도 뛰어남이 있지 않았나...
종합적으로 따지면 계백은 5000의 결사대를 이끌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거고 김유신은 그에 몇배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든거니 단순 비교는 맞지 않는듯...
장수로서의 능력을 따질 때 굳이 병사를 똑같이 해서 맞짱 뜰 필요가 있을까... 만약 내가 병사를 더 많이 모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능력이 아닐까.... 유방과 항우가 맞짱 떴다면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없었겠지만
서로 주어진 능력이 틀린데 굳이 맞짱 떴을 때 능력으로 장수의 능력을 판단한다는 자체가 의미 없을 듯....
삼국지에서 묘사하듯 개인의 전투력은 여포가 최고 이지만 그가 최고의 장수라 여기는 사람이 없듯...
장수로서의 능력을 전투력으로만 따질 수 있는 건 아닌듯...
유신의 용맹한 모습을 더 세세히 다룰 수 없었던건
전쟁씬을 찍을만큼 제작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ㅎ
다른사람들도 직장잘 다닐땐 팔팔하게 덜 늙어 보이다가 퇴직하면 팍삭. 그게 바로 제 나이로 돌아오는거져.
저전투하나가 선덕여왕평생 공적에 맞먹는데 진짜영웅은 조연으로나오는 어이없는 드라마;
유신이 남자 주인공이였는데 인물(?)과 연기력 부족으로인해 극본이 급 수정된 것이 아닐런지?(비담쪽으로) 첨 부터 미스 캐스팅. 그러니 인기있는 미실이나 비담, 의외의 인물인 알천에게 ........각본도 좀 꼬이고 역사는 말 할것도 없고...불쌍한 건 선덕여왕이지 뭐.. 예전에 덕만과유신의 러브씬때 몰입은 커녕 짜증이...... 그 이후로 유신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더군. 그래도 소소한 재미가...... 예전 사극에서는 왕이나 선비를 가운데 두고 여자들 끼리 머리끄댕이 잡고 싸웠는데, 여기서는 여왕을 두고 남자끼리ㅎㅎ.
미실을 좋아 했지만 마지막에 너무 미화시키고 영웅시 한것 같아.한 시대(드라마)에 두 영웅이라...
김유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 감사합니다
장수의 유형은 크게 보면 지장, 용장 등이 있습니다. 중국의 장수를 평하자면 여포,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은 용장이고, 조조, 제갈량, 주유 등은 지장 또는 전략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장수는 용장은 계백이 생각나고, 김유신, 이순신 등이 지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공적으로 보면 우리 역사상 김유신과 이순신 두장군의 우위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 입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더불어 삼한일통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해 냈고, 이순신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김유신은 두가지 유형 중 한가지만 갖춘 것이 아니라 용장이면서 또한 지장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김유신을 덕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그려 어이가 없어서 잘 안봅니다.
죄송하지만
김유신이 뜨기 시작한 시점은 선덕여왕말기입니다.
즉 대야성이 함락된 후부터 김유신이 명장으로 이름을 드날리죠.
낭비성전과가 있었다고 하나 나이가 어리고 하나의 전투로 갑자기 지위가 급상승했다고 보긴 어렵고
용춘,서현, 필탄, 알천등 쟁쟁한 장수등이 있었습니다.
즉 대야성이 함락되기후부터 7성을 떨어뜨리고 여러전투를 승리하면서 필탄,알천의 명성을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김유신과 선덕여왕이 나이차이가 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활동시기가 전혀 겹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기에 주로 활동한 사람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겠죠. 어쨌든 김유신은 처남인 김춘추와 더불어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의 난을 제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우고 신라의 병권을 잡았다가 진덕여왕도 후사 없이 죽자 왕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김춘추가 왕이 되므로써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강력한 연합하에 삼한일통을 할 수 있는 체지를 갖추는 것입니다.
진지왕의 폐위로 약화된 왕권을 진평왕은 직접 전쟁에 나가면서 강화시켰습니다.
그런 진평왕이 폐경기의 여성을 왕으로 지목할리가 없죠.
후사가 없는 왕은 그 자체로 왕권이 약한데
왕권이 강력한 진평왕이 부군으로 올릴리가 없습니다.
어쨋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선덕여왕이 할머니란 근거는 존재하지 않죠.
고려시대만 해도 아주 개방된 성의식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형수취사나 백제, 신라의 기록만 보더라도 이부형제, 이복형제가 많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고 천명과 덕만이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일부 존재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보더라도 덕만이 할머니라는 근거는 보이지않고 모란꽃이나 지귀설화같이 덕만의 나이가 어렸다는 근거는 많이 존재합니다.
암튼 김유신과 선덕여왕의 나이차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봅니다.
다만 왕과 장군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죠.
왕은 그 자체로 권력이지만 대신이나 장군은 수많은 공적을 쌓아야 그 직위가 올라갑니다.
김무력, 김서현이 가야계라는 약점때문에 신라계열장수보다 더 많은 공적을 쌓아야 하며 그래서 적극적으로 백제, 고구려와 싸워서 공적을 쌓을 수 있었지만 선덕여왕치세초기엔 김유신이 공적을 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즉 정황상 평화시에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신라계열의 장수는 저절로 지위가 올라가지만 가야계열의 공적을 쌓지 않으면 신라계열에 밀릴수 밖에 없겠죠.
그런데 대야성함락후에는 공적을 쌓을 기회가 생겼고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죠.
드라마에서 김유신에 대해 그렇게 왜곡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야성함락전이니까요.
더구나 덕만은 이미 왕후보로 찍혀있는 사람인데 가야계라서 출세지향적이 될수 밖에 없는 김유신이 붙어있는 것도 충분히 예상가능합니다.
다만 이제 10회밖에 없는데 제작진들이 대야성함락후에 김유신의 활약을 어떻게 조명할것인가가 문제죠.
(이제 기대도 안합니다. 이제 곧 종영인데 제대로 김유신의 활약이 묘사될지 의문투성이죠.)
하긴 유명하다는 장군들은 대부분 용장이고...
부하들도 그 영향으로 일당백있었다고 하오..
카이사르나 알렉산더도 다 그랬고...
뭐 계백도 사실 다를거 없소...
처자식 다 죽이고 결사대 꾸려서 전투에 나갔소...
황산벌에서 숫자에서 밀렷을뿐 계백이 더 뛰어난 전투를 수행한거요..
역사스폐셜에서 이순신의 마지막 대첩에 관한 내용을 본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역사를 통털어서 그정도로 지장과 용장의 특성을 두루 갖춘 명장은 몇 안될거요...
빈튼없는 철저한 계획과 정보망을 토대로 뛰어난 부하들을 모아서 전투를 승리를 했다던데... 그냥 바보같아서 호구에 빠진 왜군이 아니라는 것이었소...
사실 학익진은 공격전술이 아니라 방어전술이고, 거북선의 운용자체가 뛰어난 인력을 토대로 이루것이오...
공격에 무턱대고 학익진 써보시요 어떤일이 벌어질지... 상상에 맞기겟소...
한나라의 위대한 장군 또는 전략가는 평화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김유신,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처럼 전쟁의 시기에 나타납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삼국지시대에 여러 뛰어난 여러유형의 장군들이 나타납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역사의 가정일 뿐이라고 봅니다. 삼한일통을 이루어낸 신라의 저력은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이 다진 초석을 김유신, 김춘추가 이어 받아 문무왕이 완성하게 되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김유신과 김춘추의 공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저는 둘 중에서도 공의 우위를 가리라면 김유신의 공을 높이 쳐주고 싶습니다. 신라의 후대에 와서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것을 보아도 김유신의 공이 얼마나 큰지 알수 있는 것이죠. 역사는 어찌보면 1-2백년 후대 쯤에 와서 객관적으로 보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도 선조 당대 보다는 1-2백년 후대에 그 공을 더 높게 평가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선덕여왕도 업적이 적은 편이지만 가장 큰 업적은 김유신과 김춘추를 적극 키워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만들었죠.
그당시 김유신은 모계로 따지면 신라의 왕손이긴 하지만 부계로 따지면 가야구형왕의 자손이고 김춘추도 페위된 진지왕의 손자라서 정치적입지가 약했습니다.
김서현은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 김무력과 신라의 공주인 아양공주의 아들입니다.
즉 가야의 왕족이자 신라의 왕족이죠.
김유신은 김서현의 아들이자 신라공주인 만명공주의 아들이죠.
즉 김서현, 김유신은 신라의 왕족이면서 가야의 왕족이 됩니다.
단 금관가야의 왕손의 적통이기때문에 신라의 견제을 많이 받습니다.
혹시 신라을 배신해서 금관가야을 세울지 않을까 하구요.
김서현은 만노군으로 좌천된것을 보면 역시 가야의 왕손라는 딱지가 붙어서 신라쪽에선 신뢰하기 힘들죠.
조선시대에서 조선왕이 고려왕의 씨를 말린거나 선조가 이순신을 쓸잘데기 없는 이유로 투옥한 예를 생각해보면 신라왕이 김서현과 김유신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는 지극히 당연하겠죠.
(김서현 아버지 무력이 야양공주와 결혼했는데도 별 반응없다가 김서현이 만명공주와 결혼할때 야합이라는 별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만노군으로 좌천하는 것을 보면 견제라고 보여집니다.실제로 진흥왕과 진평양은 가야계를 경계해서 가야유민을 국경지역, 변경지역, 전쟁위험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항상 백제하고 고구려하고 전쟁나면 가야인들이 화살받이역할을 했씁니다.)
신라가 가야계인물에 대한 배척은 김서현은 심했지만 김유신도 자세히 보면 정말 배척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서현과 김유신은 중앙에 진출하지도 못한채 항상 변방이나 전장을 떠돌아다녔고 이런 상황은 영원히 계속될것 같았지만 선덕여왕때 김유신을 중임해 별볼일 없는 김유신이 이때부터 신라 무장 세력의 핵심으로 성장합니다.
진지왕이 폐위당하지 않았다면 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은 왕위에 올랐가야할 사람들입니다.
즉 용춘의 장인인 진평왕은 진지왕과 용춘의 왕 자리를 빼앗은 인물이죠.
따지고 보면 진평왕을 왕으로 만든 귀족들은 모두 용춘,춘추의 적들인 셈입니다.
진평왕은 진지왕이 폐위되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를 자신의 딸 천명과 결혼시켜 포용하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 줄 정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용춘를 왕위에 올라가면 진지왕을 폐위하고 진평왕을 옹립한 귀족세력들이 자신들의 목을 용춘의 보복 앞에 놓이는 위험한 상황이 되죠.
폐위된 왕의 자손이라는 것은 언제 죽음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들입니다.
또 진평왕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춘추가 왕위에 오르면 정치 보복이 시작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용춘, 춘추가 살아남는 길은 '왕위에 욕심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다른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고 선덕여왕에게 적극 협조하는 길 뿐이죠.
오히려 춘추는 대외적으로 외교 활동으로 큰 공을 세우고, 안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김유신과 손을 잡습니다.
덕만은 신라최초의 여왕이기에 덕만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기득권이 아닌 세력과 손을 잡을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셋이나 둔 것도 결국 귀족을 견제하고 가까이 친위세력을 두기 위함이며,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소외되어 있던 신진세력을 등용한 것도 이들이 아직 귀족들과 손이 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계사적으로도 군주가 자신의 권한을 강화할 때는 비빌 구석이 없던 신진세력을 등용해 그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 그러한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이 결혼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페위된 진지왕의 자손이지만 왕족중에 왕족인 김춘추와 멸망한 가야계 왕족에 불과한 김유신의 여동생이? 그러나 김유신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고, 선덕여왕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김유신에게는 중앙정계와 연결될 끈이, 선덕여왕에게는 기존의 귀족들과는 분리된 또다른 친위세력이 필요했죠. 그 사이에서 거래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김춘추, 그러나 이는 또한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진평왕이 칠숙, 석품의 난 이후 8개월 뒤에 사망한 점으로 보아, 칠숙의 난은 연로한 진평왕의 죽음이 임박하여 덕만의 집권 준비가 진행되던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난을 적극적으로 진압한 사람은 진평왕이 아니라 덕만일수 있습니다.
즉 선덕여왕은 문희, 춘추의 결혼에 개입하여 용춘, 서현의 충성을 얻었습니다.
선덕여왕 집권기에 김용춘과 김서현이 여왕의 양 날개가 되어 한 사람은 외교를 맡고 한 사람은 군사를 맡게 된 데에는 칠숙,석품의 난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은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와 김서현의 아들인 김유신이 그대로 물려받았죠.
삼국사기에 의하면 덕만은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전임자인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또 후임자인 진덕여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신라최초의 여왕이기에 귀족들의 받대가 극심한 덕만은 김유신불쏘사건으로 통해 김용춘과 김서현을 부하로 삼아 적극적으로 칠숙, 석품의 난을 제압해서 자신의 여왕등극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항복을 받고 왕위에 등극하게 됩니다.
선덕여왕초기엔 김유신,김춘추가 별 활약없다가 선덕여왕말기엔 김유신과 김춘추가 ㅎㄷㄷ한 활약을 하죠.
비담은 선덕여왕이 죽는 순간 반란을 일으킨것을 보면 반란대상은 선덕여왕이 아니라 김춘추,김유신으로 보입니다.
즉 비담은 진지왕의 페위에 관련된 귀족이나 그 귀족의 자손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비담의 난때 김유신의 도움을 받은 김춘추는 수많은 귀족을 도륙했는데 아마도 그대상은 비담뿐만 아니라 진지왕의 페위에 관련된 귀족까지 척살한 것으로 보이구요.
김춘추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죠.
김춘추는 그 먼세월동안 겉으론 선덕여왕한테 충성하는 척하면서 칼을 갈다가 선덕여왕의 보호하에 자신의 세력을 급격하게 키운후 선덕여왕사후 김유신과 더불어 반대파를 모두 도륙내고 모든 권력을 움켜쥐었으니까요.
김유신과 김춘추가 없다면 신라는 절대 삼국통일을 못했을 것이지만 선덕여왕이 없다면 김유신은 가야계란 핸디캡이 인해 그냥 지방귀족으로 끝날 운명이고 김춘추또한 왕위는 커녕 반대파에 견제을 당하거나 암살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마보다 짜쯩나는 점은 진평왕이 너무 무능하게 그렸다는 것입니다.
실제의 진평왕은 굉장히 유능한 왕이며 전쟁의 승리로 인해 진지왕의 폐위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켰고 진평왕의 강력한 왕권으로 여성의 핸디캡이 있는 덕만을 신라최초의 여왕으로 만들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