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은 내가 변했다고 말한다

내 음악이 변했단다. 음악에 대한 해석이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 졌다고…
그리고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것이 없어지고 작곡가와 대화를 나누듯 작곡가 의도 속의 감정을 풍부화 시켰다나?
내겐 이런 사탕발림 같은 칭찬이 익숙하지 않다.

이젠 여기를 떠나 뮌헨 필로 가야 하는데… 지휘자 생활이 사실은 떠돌이 생활이거든.
언제든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지휘자 인생인데…
이곳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왜 이리도 한쪽 구석이 허전한 걸까?
시향이 곧 해산할 것 같아서? 단원들이 그걸 막아보고자 철야 농성을 하고 있어서? 뭘까?

마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찾지 못해 놔두고 가는 듯하다. 그게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2. 난 루미가 강해지길 바란다

난, 루미가 집 앞에까지 오고도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는 걸 봤다.
사실… 내가 루미를 불러들일 수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떠나면 또 언제 오려는지 기약할 수 없는데… 루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고 싶진 않았다.
루미의 마음을 밀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 감정까지 부정할 순 없다.
난 루미에게 '토벤이가 보자는데'라는 말로 불러냈다. 내가 보자고 말하긴 쑥스럽잖아.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루미가 핸드폰으로 날 찍고 있다.
모르면 몰랐을까… 찍게 내버려두긴 너무 낯 간지럽지. 그래서 찍지 말라고 했다.
내 얼굴에 무슨 대단한 초상권이 붙은 스타도 아닌데 말이지…

루미란 이 녀석은 내가 그렇게 밀어냈는데도… 여전히 날 떠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데… 이건 비밀이다.

뭔가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루미. 내가 줄 것은 오래도록 끼고 다녔던 반지밖에 없다.
그걸 주긴 줘야 하는데… 그냥 '손 한번 내밀어 봐'라고는 하긴 좀 그렇고… 핸드폰 핑계를 댔다. 뭘 찍었나 검사한다고…

그리고 내 새끼손가락과 함께 내 음악 인생이 담긴 베토벤 생가에서 산 반지를 건넸다.
내가 강해지려고 한 끼 밥값밖에 없던 내가 돈 탁탁 털어서 산 그 반지로… 루미도 강해지길…

#3. 나는 과거형… 루미는 현재형

루미는 날 강당으로 이끌었다. 자기가 귀 먹어가며 공력을 키우기 위해 맨발로 진동을 느끼는 연습을 하는 곳이라고…
작곡 공부를 시작한 건 알았지만… 이런 것까지 할 줄은 몰랐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루미, 무슨 말이든 다 해보란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바닥에서 냉기 올라와. 입 돌아가고 싶어?"

루미 "루미야! 넌 어쩜 그렇게 이쁘니?"

"해석 좀 제대로 하지!"

루미 "성격두 좋구… 맘에 들어!"

"자화자찬 타임이야?"

루미 "내가 하는 말도 딱딱 다 알아듣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 들을 수 있겠어.

선생님! 이제… 진짜 얘기 좀 해 보세요."

(그래… 나도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해… 아무리 루미가 내 맘을 잘 안다고 해도… 내가 심하게 몰아붙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그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니라는 거… 알지?"

루미 "흔들리는 게 겁이 났을 뿐이야."

"근데 또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거구! 그때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거… 알아."

루미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니까…"

"고마웠어."

루미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꼭 하고 떠나고 싶었다.
루미는 고마웠다는 말을 고마워라고 해석했다. 결코, 과거의 일로 넘겨 버리고 싶지 않은 걸까?

#4. 건우 이 녀석 또 일을 벌인다

난 분명 건우에게 수능 시험에서 1등급 받고… 대학 가서도 연주 활동 열심히 하면… 그러면 정식 제자로 삼아 준다고 했는데…
건우 이 녀석 또 공연을 한단다. 그것도 시향을 살리자고 시위하고 있는 단원들과 함께 합동 공연을…
게다가 나에게 지휘까지 해 달라고?

나 이제 겨우 무거운 짐을 덜고 떠나려고 하는데… 내가 여기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기 힘든 상황인데…
건우란 놈은 또 무모한 공연을 하겠단다. 난 당연히 하지 말라고 했지.
예전에 교향악 페스티벌 실패한 거랑… 시향 잘린 거랑… 실패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 줬지만…
난 안다. 저 녀석이 그런 말로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또 실패하면… 또 단원들이 상처받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일을 벌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제일 두려운 건… 저들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어도 미리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란 거다.
건우 저 녀석이 날 또 심란하게 만든다.

#5. 내가 벌써 마의 징크스를 깬 거야? '오케스트라 킬러'의 아성이 무너진 거야?

건우…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안자고 옆에 붙어 있는 걸 보면…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달라. 또 날 설득하려 하고 있다. 내 그럴 줄 알고… 출국 날짜를 바꿔놨다.
쟤들이 공연하는 날… 내가 여기 없을 수 있는 상황이어야…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건우는 내가 출국 날짜를 바꿔놨다는 얘기를 듣고서 꽤 실망한 것 같다.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거… 난 가야겠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또 그들 꼬임에 넘어갈지 모르거든.

마지막 건우의 당부는 '오케스트라 킬러'란 소리를 듣지 말았으면 하는 거였다.
그래 나도 그러려고 해. 이제부터는… 적어도 6개월은 넘길 거라구…

그런데… 나 이미 이 녀석들과 6개월을 넘겼단다. 나도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른 줄 몰랐다.
벌써 그렇게 됐었나?

#6. 건우는 공연 중…

공연은 아마 잘 진행되고 있을 거다. 초반엔 좀 쉬운 곡으로 한다고 했으니…
그동안 내가 가르친 데로 한다면 별 무리는 없을 거다.

#7. 나도 정말 그냥 떠나려 했었다

난 일부러 건우가 일어나기 전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또 한 번 설득을 당하면 나도 어찌 될지 몰라서…
난 공항으로 가고 있었는데… 건우 녀석이 수재민들이 홍보를 도와줄 거란 얘기를 하긴 했지만…
플래카드가 거리를 도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설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수재민을 만날 건 뭐냔 말야…
'어디가? 당신이 지휘자잖아…'라고 말할 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그렇게 공항에 가서 비행기에만 오르면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니까…
정말 그렇게 그냥 가려고 했다. 그 망할 놈의 건우의 문자만 아니었다면…

근데… 사실 그 내용은 내가 그리 화낼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난 어쩌면 너무나도 간절히… 어떤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그마한 핑계를 대고 난 결국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결국 건우가 부탁한 그 지휘를 하게 됐다.

#8.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다

나, 다시 단원들과 '합창'을 노래한다.
내가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들었던 그 구원의 '합창'을 지금 다시 나의 단원들과 연주하고 노래한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기엔… 내가 이만큼 오기까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연주하는 그들도 나와 같다.
나도 죽어라.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명품'이 될 줄 믿었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안다.

내가 오늘 출국을 미루고 여기 돌아와 이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것이 그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될지… 아니면 이들과 함께 할 시작이 될지…
그건 사실 나도 모른다.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늘 원곡 그대로만 해석하는 나의 지휘는… 전통적 방식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거든… 그런데 나만 변하지 않았었거든…
그런 내가… 저 오합지졸들을 만나며 '사람 냄새가 풍기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걸… 나도 이제는 안다.
난 지금 막…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다. 그 앞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날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내 단원들이 '꿈'을 이룬 것처럼… 나도 그럴 거거든! ^^

2008/12/03 02:47 2008/12/03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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