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10/29JBC - X파일안익태가 친일파면 애국가는---?(9)
  2. 2009/10/27JBC - X파일왕표, 밥샙 좀 말려줘
  3. 2009/10/24JBC - X파일액스재판 토시와 저녁 먹다(4)
  4. 2009/10/16JBC - X파일퍼거슨 감독 루니 좀 말려줘
  5. 2009/10/13JBC - X파일박치기왕 김일 생가를 가다

안익태. 한국의 작곡가·지휘자. 1936년에 <애국가>를 작곡했습니다. 안익태는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마요르카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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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는 안익태 연합뉴스 

홍난파. 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선구자입니다. 서양 음악을 보급하였습니다. 작품으로 〈봉선화〉, 〈성불사의 밤〉, 〈봄처녀〉, 〈낮에 나온 반달〉이 있습니다. 
 북한의 무용가 최승희.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활동한 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한국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하였습니다. 구미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동양의 무희'로 불리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다. 월북 후 평양에서 조선춤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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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추는 최승희      연합뉴스
 

 다음달 8일 식민지 시절 일제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들을 포함,  4370여명의 명단이 공개됩니다.
 수록된 인물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부통령,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월북 민족 무용가 최승희 등 정치, 언론, 문학, 음악, 무용 등 사회 각 분야 지도층 주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습니다.
  명단에 포함된 친일파인사들은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ㆍ식민통치ㆍ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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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박정희 인터넷 기념관
 
 한 학자는  "박정희, 김성수, 안익태, 홍난파 등 우리 민족을 이끌고 우리의 정서를 채워준 선각자 지도자 창작가들이 친일파라니 기준이 뭔지 궁금하다"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또  “사전편찬 작업은 지난 60년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규정한 정권이 주도했고 그런 색깔의 사람들이 친일 명단을 추려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역도산도 친일파(?)
 이 경우와는 다르지만 역도산 예를 들겠습니다. 친일 명단에 역도산이 포함돼 있진 않지만 조선인 출신 일본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지금도 친일파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출생인 역도산은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습니다. 일각에선 역도산이 조선어(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스모를 했고, 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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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

 그러나  "역도산이 친일파"다 "아니다"란 논의 자체가  거북스럽습니다.  역도산에 대해 광범위하게 취재를 하고, 증언을 들었던 결과 역도산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란 견해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분 중 역도산에 대해 깊이 있는 조사를 한 적 있습니까.  
 역도산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역도산이 건너간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가 친일파일까요.
 만약 지금 일본으로 출장을 갔거나, 여행을 간 사람들이라면 일본어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아십니까.
 당시 역도산은 15세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 15세는 중학교 2학년생입니다. 그 어린 소년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번쯤 내 동생 형, 자식이다 생각하고 떠올려 보십시요.
 그 어린나이에 역도산이 조선어를 사용해야 합니까. 스모 선수로 변신한 역도산이 조선인 이름 '김신락'이어야  했나요.
 중요한 건, 역도산은 조선의 정신을 잃지 않고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일본 최고의 영웅이 됐지 않습니까.   역도산은 58년 동경아시안게임은 물론이고, 한국 복싱 사상 첫 세계채핌언 김기수씨 후원과 일본 재일 한국인 야구 영웅 장훈까지 후원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을 친일파로 불러야 하나요.
 물론 이번에 발표되는 친일 행적자들은 역도산 경우와는 다를 것입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매국 행위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 식민 지배의 하수인 노릇을 했거나, 침략전쟁을 미화·선전한 자들 입니다.
 이들은 철저히 가려내 공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친일이다", "아니다" . 삶을 무우 자르듯 양분화 시킬 수 있겠습니까. 삶은 실타래처럼 복잡합니다.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안익태가 친일파였다면, 그렇다면  <애국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껏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따라 불렀단 말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입니까. 친일파가 작곡한 애국가라면 그 애국가가 일본 애국가 <기미가요> 후속곡입니까.  참으로 웃기고 헷갈립니다.  만사형통 하십시요.

 

2009/10/29 11:12 2009/10/29 11:12
"이왕표 잡으러 왔다."
 야수 밥 샙이 진짜 이왕표를 잡았네요. 밥 샙은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고 김일 추모 프로레슬링대회 '포에버 히어로 4' 메인매치에서 이왕표와 맞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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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룰로 진행된 시합에서 이왕표가 드롭킥과 각종 고난위도 기술을 구사하며, 기선을 제압했으나, 경기 시작 6분이 지난 시점에서 초청 선수인 레더페이스가 철재의자로 이왕표의 머리를 가격, 분위기가 급반전됐습니다.
 이왕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밥 샙은 드롭킥을 가격했고, 이왕표는 그 상태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경기후 계속 두통을 호소한 이왕표는 27일 새벽 서울 강서구 신월동 오승재 정형외과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이날 오후 병원에 입원중인 이왕표 면회를 갔습니다. 목 깁스를 하고, 링겔 주사를 맞고 있는 이왕표에게 다가가 "밥 샙 말대로, 진짜 잡혔네요"라고 하자, 이왕표는 "잡혔어, 잡혔어"라며 허허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왕표는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며 스승인 김일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김일 선생은 말년 프로레슬링 경기로 인한 후유증으로 14년간 병실에서 생활했습니다.
 입원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왕표는 "병원이 너무 갑갑하다. 14년간 병원에서 지낸 스승의 고초를 알 것 같다"며 손을 절레 절레 흔들었습니다.
 화제를 돌려, 밥 샙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밥 샙의 인기가 너무 좋다고 하자, 이왕표는 "프로레슬링 뿐만 아니라 예능자로서도 대성할 자질이 있다"고 추켜세웠습니다.
  최근 밥 샙은 ‘개그콘서트’를 비롯 각종 오락프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큰 덩치와는 달리 해맑은 눈망울로 귀여운 표정을 짓고 킹콩 포즈를 취하는 등 예능끼와 다양한 매력을 펼쳐보였습니다.

 

 밥 샙을 처음 본 것은 지난해 11월 이었습니다. 이왕표와의 경기에서 패한 후 밥 샙은 비난 여론에 시달렸습니다. 팬들이 각본설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 도쿄로 출국하기 전 밥 샙을 만났습니다. 제기됐던 승부 조작설과 관련, 밥 샙에게 "사전 각본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라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밥 샙은 “각본이라니?"라고 반문한 뒤 "절대 없었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밥 샙은 “내 패전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마 경기 진행이 일반적인 MMA 경기와 달라서 팬들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밥 샙은 패전 이유에 대해 “나는 원래 프로레슬링 룰로 경기를 치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5일 한국에 입국해서야 MMA 룰이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고 언급했습니다. 밥 샙은 자존심이 무척 상한 듯 이왕표와의 재대결을 강력히 원했습니다. 결국 그는 재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경기장만 벗어나면 밥 샙은 한마리의  '양' 처럼 온순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처럼 느껴졌습니다. 뭐~ 밥 샙이 좋은 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밥 샙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정말 '야수'인지 의아심이 들 정도 입니다. 밥 샙은 순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매사 진지 했습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앉는 자세가 불량하다 할 정도. 그는 정 자세로 앉아서 식사를 못했습니다.
 


한쪽 손과 팔은 바닥을 짚고, 몸은 벽을 기대 챈 60도 정도 옆으로 숙입니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본 사람은 "저런 싸가지 없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200cm, 170kg 그의 신체적 조건을 생각해보세요. 정상적으로 앉아서 밥 먹는게 그에겐 고문 일것입니다. 애초 테이블이 아닌 룸을 선택해서 밥을 먹은 우리들의 잘못이죠.
  만사형통 하십시요.
2009/10/27 20:03 2009/10/27 20:03
 지난 17일 토요일 오후 홍대 서교호텔에서 엑스재팬(X-JAPAN) 보컬 토시(44·Toshi)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토시가 누구냐고요. 토시는 유럽 스타일의 빠른 메탈록과 동양적인 선율로 일본 대중음악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록그룹 액스 재팬의 멤버 입니다.
 토시는 처음 만났습니다. 토시에 대한 첫 느낌은 "참 친절하고 매너가 좋다"였습니다. 토시는 저녁 식사중 자신의 신곡을 선물하기 위해 직접 호텔 방까지 가서 CD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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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오른쪽)가 자신의 신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녁 식사 때 나온 메뉴를 보고, 어떻게 요리하는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또 상대방 얘기는 끝까지 경청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곤 했습니다.
 그와의 저녁 식사때 메뉴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된장찌개, 김치, 나물, 다양한 전 등 순전히 한국식 이었습니다.
 토시는 여느 스타들 처럼 도도하고 잘난 척 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주 순수했고, 친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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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왼쪽이 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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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토시(왼쪽서 두번째)와 기념촬영.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토시가 일본 대중 음악계의 신화적 존재로 군림했던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엑스재팬에 대해선 잘 알지만, 그 멤버 중 한명인 토시에 대해선 얘기만 들었지 잘 몰랐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키는 168cm, 체중 48kg.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죠.  '그 조그만 체구에서 메탈 록이 나온다---?'고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토시는 1991년 제5회 일본 골든디스크 뮤직비디오상, 1990년 일본 유성음악대상 우수 음악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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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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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 때 토시.      출처=네이버

 이날 저녁 식사 후 토시는 서울 한강시민공원 난지지구 잔디마당 특설무대로 달려갔습니다.  '2009 대한민국 라이브 뮤직페스티벌'에 특별 게스토로 초청돼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 였습니다.  
  내친김에 토시 일행들과 함께 난지도 공원 공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토시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죠. 토시는 저녁 9시 10분경 무대에 올랐습니다.
  전날에 비가 온 탓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추웠습니다. 헌데, 토시의 팬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라이브 가수들이 출연하자 수천명의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위로 뛰면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깐, 추위는 젊음의 열정속에 녹여드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토시의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세곡을 불렀습니다. 토시의 강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자 귀가 멍 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강시민공원에 저렁저렁 울렸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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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창하고 있는 토시.
 

그의 공연을 보면서 토시가 왜 이 무대에 섰을까 생각했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많은 스태프 속에 최소한 10만명 이상 관객들 앞에서 섰던 그가 토시 아닙니까. 그런데 순전히 라이브를 좋아하는 한국의 팬들을 위해 야외무대에 선 토시 였습니다. 


   팬들에 웃고 있는 토시.      출저=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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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들은 얘긴데, 전성기 시절 토시는 여간 깐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가수 중의 한명었다고 합니다. 그는 소위 로마의 황제 같았다고 합니다.
 먹는 것 빼놓고 모든 건 비서격인 사람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 종교 세계를 알면서 대중들과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흔한 말로 요즘 그는 한 사람의 팬이라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다면 달려가  부른다고 합니다.
 자선공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가 한강시민공원에서 노래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팬들이 원했기 때문에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참고로, 토시는 지난해 1월 한국 공연 수익금을 기름 유출사고를 겪은 충남 태안 주민을 돕는 성금으로 기탁했습니다.
 토시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파이팅 토시^^

 
2009/10/24 08:37 2009/10/24 08:37

퍼거슨 감독 루니 좀 말려줘

맨유비사 2009/10/16 10:20JBC - X파일

 퍼거슨도 못 말렸던 루니

'루니가 축구에만 몰두하는 전형적인 파이터이며, 동료애를 중시하는 타입이라면, 호날두는 그라운드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혼자만의 영역을 추구하는 집념과 욕심을 가졌다'
세계 최강의 축구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한국 원정기를 담은 책이 발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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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퍼 감독, 루니 좀 말려줘』저자는 김석현 전 일간스포츠 상무(현 중앙일보 팩트 체커)입니다. 김 전 상무는 '맨유 코리아 투어 2007'을 총 지휘했습니다.
 저는 당시 맨유 담당 부장으로 현장을 함께 했습니다.  블로그에 맨유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 맨유비사를 적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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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맨유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두 차례 한국에 머물며 남긴 갖가지 재미있는 일화들, 그리고 '사상 최대의 베팅'이었던 맨유 코리아 투어의 성사를 위해 그 공룡구단과 줄다리기 한 사연들을 익살맞은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가볍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소개돼 있습니다.

1부 '축구화 벗은 악동들'에서는 루니가 호텔에서 밤새 동료의 방을 돌면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부터 한국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왔다 간 축구황제 호날두의 톡톡 튀던 모습, 그리고 박지성의 단짝 에브라와 최고참 긱스 등 맨유의 슈퍼스타들이 축구장 밖에서 보여준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다루었습니다. 또 맨유를 세계 최고로 만드는 그들만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독특한 팀 관리 방식도 함께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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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FC서울과의 경기 등 공식 행사 전후에 벌어진 사건들, 한국의 광팬들과 선수들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을 그리고 있으며, 3부 '공룡과 씨름 7개월'에서는 맨유의 알짜 선수들을 모두 데려오기 위해, 부상 중인 박지성을 경기장에 세우기 위해, 데이빗 길 맨유 사장을 홍보사절로 불러오기 위해, 7개월 동안 구단·에이전트와 씨름한 현장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처음 맨유를 한국에 데려오면서 ‘사상 최대의 베팅'을 했습니다. 맨유를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것 워낙 큰 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이벤트가 이후 스포츠 마케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책은 그 베팅 과정을 생생히 담아 스포츠 마케팅에 도움이 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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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제가 맨유 비사를 적으면서 밝힐 수 없었던 진짜 비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큰 파장을 우려해 그 비화는 공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메가톤급 비화를 아는 사람은 이 책의 저자인 김 전 상무와 저 두명 뿐입니다.  이 책에선 그 비화를 공개했습니다.
 대충 뭐나면요. 당시 맨유와 FC경기가 열렸던 서울월드컵경기장에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맨유가 테러를 당할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속에 저는 대테러 담당 요원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밝히겠습니다.  만사형통 하십시요. ^^

2009/10/16 10:20 2009/10/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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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TV가 등장한 60년대.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국민들의 상처를 씻어주는 '영웅'이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박치기 왕' 고 김일 선생 입니다.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숱한 감동을 안겨줬던 김일 선생은 2006년 10월 26일 작고했습니다. 현재 김일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영면해 있습니다.

 

 생가를 가다

지난 8일 김일씨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김일 선생 후계자 이왕표 등 레슬링 관계자들과 함께 갔습니다. 묘도 찾았습니다. 김일 선생 생가와 묘를 간 것은 오는 26일이 3주기인데다, 전남 고흥군 어전리에 김일 선생을 추모하는 체육관이 건립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전남 고흥군은 지난달 24일 김 선생의 고향인 금산면 어전리에서 김일 기념체육관 건립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국비 등 40억 원이 투입되는 이 체육관은 건축 연면적 2200m²(약 660평) 규모로 전시관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체육관 안에 설치되는 기념관에는 김 선생이 생전 경기 때 입었던 옷과 챔피언 벨트, 우승컵, 경기 사진 등이 전시됩니다. 생전 경기 모습 등을 보여주는 영상관도 마련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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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표 초대 못받아

문제는 이런 뜻깊은 기공식에 후계자 이왕표는 물론 프로레슬링 제자 등 한명도 초대 받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김일 선생 자서전을 냈습니다. 제목은 '굿바이 김일' 입니다. 그 자서전 발간을 위해 거의 1년 동안 김일 선생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생가도 3번 갔다 왔습니다. 그 책은 김일 선생 작고 후 한달 만에 발간됐습니다. 일본서도 출판 됐습니다. 일본서 가장 큰 고단샤 출판사에서 발간했습니다. 2006년 12월 일본서 출판기념회도 개최했습니다.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저도 기공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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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추억
 
지난 8일 김일 선생 생가를 향하면서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 처럼 스쳤습니다.  2006년 2월 김일 선생을 승용차에 태운 후 전남 순천시내를 가로지른 후 벌교를 지나 고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초행일수밖에 없었던 저는 길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런 것을 짐작했었는지, 김일 선생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조그만 가면 벌교 상고 앞입니다. 저기서 좌회전을 잘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네비케이션 노릇까지 했습니다.
 승용차가 고흥군에 진입하자 "과거 비포장 도로라 고흥 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면 버스가 하도 쿵딱 쿵딱 뛰어 마치 탱크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며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김일 씨의 가이드를 받으며 부산을 출발한 지 5시만인 오후 6시 마침내 고향인 고흥군 녹도항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거금도였습니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20분 가량 들어가야 했습니다. 배 시간에 맞춰 한 장어구이 식당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 8시 배를 타고 생가가 있는 거금도에 도착했습니다. 언제 다시 올 지 알 수 없는 고향집에 다다르자 감정이 복받치는 듯 얼굴에선 무상함이 묻어났습니다. 생가에는 50여장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만이 지난 시절 화려했던 김일 선생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역도산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제 나도 얼마 안있으면 저 분 곁으로 가겠지"라며 역도산을 너무 그리워 했습니다. 그는 고향 산을 바라보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듯' 레슬링을 하면서 남긴 모든 것은 사회로 되돌려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국민이 있었기에 김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속의 김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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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땅 묘

특히 김일 선생은 죽어도 고향땅에는 묻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김일 선생은 고향땅에 묻혔습니다.  서울서 그 고향은 너무나 멀었습니다. 8일 오전 5시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고흥에는 11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생가까지 1시간 더 소요됐습니다. 국민 영웅 김일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게 멀었습니다. 일반인들이 큰 마음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김일 선생 생가와 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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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묘를 둘러본 후 그 뒤 생가 기념관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 생가 기념관에서 김일 선생과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김일 선생의 사진과 유품이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했습니다.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고흥군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지난 3년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어이없었습니다. 누가 열쇠를 관리하는 지 물었습니다.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3년전 김일 선생과 생가를 방문했을 때 김일 선생이 소장중인 많은 기념품과 사진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습니다. 집안에는 매캐한 냄새와 사진에는 곰팡이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함께 간 이호형 기자와 함께 큰 맘 먹고 사진 정리와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후 지금까지 생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고흥군 관계자에게 부탁합니다. 김일 선생 기념관 건립도 중요하지만 현재 있는 기념관이라도 제대로 관리해달라고. 헌데 고흥군 관계자는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기념관은 가족 명의로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허락 받지 않고 문을 열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김일 선생이 살아 생전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금산면 사무소에서 등기부대장을 확인해 봤습니다. 소유자 김일, 김해 김씨 종친이었습니다. 생가는 종친 소유라는 김일 선생 말이 맞았습니다.
 10월26일 3주기 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2009/10/13 16:39 2009/10/13 1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