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그 사람'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11/16JBC - X파일일본인 참사자 명복을 빌며(2)
  2. 2009/11/11JBC - X파일super dad와 장나라 아버지(1)
  3. 2009/11/04JBC - X파일굿바이 박용오(1)
  4. 2009/10/27JBC - X파일왕표, 밥샙 좀 말려줘
  5. 2009/10/24JBC - X파일액스재판 토시와 저녁 먹다(4)
  6. 2009/10/13JBC - X파일박치기왕 김일 생가를 가다
  7. 2008/12/26JBC - X파일조기축구회와 프로축구 송년회
'만약 한국인이 일본을 여행하다가 사고로 인해 7명이 죽었다'면 유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그런데 타국에서 억울하게 사망했던 사람들을 향해 자국민들이 "잘 죽었다"고 한다면 유족들 뿐만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 심정은 또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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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사 화재 현장. 연합뉴스
 
14일 오후 발생한 '부산 실내 사격장 화재'사건의 기사를 읽다가 '악플'(악성 댓글)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일부 철없는 네티즌 악플이었지만 정말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철없는 네티즌들은 일본인들이 참사한 것에 대해 애도는 커녕, "잘 됐다"는 식이었습니다.  최근 악플로 넘쳐나는 인터넷 상에서 선플을 달자는 사회성 캠페인도 이들에겐 소용이 없었나 봅니다.
악플 발단은 지난 15일 일본인 사망자 유가족들이 오열하면서 한국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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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하는 일본인 참사자 유가족. 연합뉴스


 유가족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며 한국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유가족 들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 입니다. 당연한 얘기 일 수 있습니다. 내 남편, 자식이 이국땅에서 죽었다면 그 나라 가고 싶겠습니까.
 문제는 이같은 유족의 반응에 대해 네티즌들이 과거 민족사 문제와 결부시키면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에 악플을 달았습니다.
 죽음앞에선 악플 안됩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고발성 기사를 적었습니다. 기사를 적기 전에 고민을 했습니다. 혹시 일본 언론과 네티즌들이 한국의 철없는 네티즌 악플에  대해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악플은 어떤 경우든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네티즌은 저에게 항의성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가족들에게는 정말로 안된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댓글의 내용을 가지고 기사를 만들다니 참 어이가 없군요.  댓글의 내용이 기사거리나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댓글 단 사람들은 분명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게시판 댓글 문화 그 자체가 부정적일 수 없습니다. 자유롭고 건강한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어야합니다.그의 주장대로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터넷 댓글은 약(藥)이 될 수도 독(毒)도 될 수도 있습니다. 약은 선플일 수 있고, 독은 악플쪽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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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에게 사죄하는 정운찬 총리/연합뉴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권리에 의무가 따르듯이 표현의 자유에도 의무가 필요합니다.
 이번 일본인 참사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 그들의 사망에 대해 이런 저런 글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욕설이나 비방,악성 댓글 등으로 인해 상대방이 겪게되는 큰 아픔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인간은 죽음 앞에선 경건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든, 한국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사람들은 망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합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일본 관광객들의 죽음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행한 역사적 문제와 결부시켜면서 그들의 참사를 오도했습니다.  
 일본은 지난 36년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로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죽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화재 참사로 인해 일본인 7명이 여행중 사고로 참사했고, 유가족들이 슬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과거 조선인을 핍박했고,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부산 화재 참사로 인한 그들의 죽음까지 역사의 연장선성에서 치부하고, 그래서 당연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해 악플 달지 맙시다. 참사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2009/11/16 14:52 2009/11/16 14:52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가 “대외적인 능력을 갖추면서도 엄마의 역할까지 해 줄 수 있는 가정적인 아빠를 21세기 슈퍼대드(super dad), 알파남”이라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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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딸들/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대표적 알파남 아빠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 전설적인 골퍼 잭 니클라우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이라고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은 명예는 기본이고 부성애까지 갖춘 '슈퍼 대드(super dad)'로 꼽았습니다.
 우즈는 골프 경기 전후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잭 니클라우스는 아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연속 경기 일정을 잡지 않습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취임후 아프리카 순방중에 두 딸과 가나의 옛 노예무역 항구를 방문해 역사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들이 슈퍼 대드가 된 것은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어릴적 교육 입니다. 그러나 학창시절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오바마는 결혼 후 가정의 절실함을 깨달았는지 자식들에만은 끔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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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 딸들/연합뉴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오늘날 최고의 부와 명성을 거머쥔 것도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의 영향 입니다.
 빌 게이츠는 미국의 유명 경지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내가 못하는 일을 잘 하도록 격려하고 밖에 나가 수영·풋볼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라고 북돋워준 것이 아버지로부터 얻은 가장 훌륭한 조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저녁 식사 시간에 항상 대화를 통해 부모님과 생각을 교환했다"며 "MS 설립 이후에도 아버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사막 여행을 떠나 사막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이 자신의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됐다고 합니다.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는 아들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 골프에서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아들이 두 살일 때 높은 의자에 앉혀놓고 골프 치는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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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출신의 영웅 마쓰이다. 그가 프로로 진출한 스무 살에 최연소 4번 타자가 돼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을 때 일입니다. 이시카와현의 고향 집에 돌아온 그는 구름처럼 몰려든 취재진과 팬들을 쭉 한 번 둘러보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온 마쓰이는 부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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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이/연합뉴스

“세상 사람들은 야구라고 하는 너의 극히 일부분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지, 너라는 인간 전체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너의 조금 전 태도는 명백히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고 야단쳤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으로 인해 마쓰이는 늘 겸손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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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호성 장나라 부녀

국내에도 대표적 알파대디가 있습니다. 배우 주호성(59)씨 입니다. 장나라 아버지죠. 그가 가수 겸 배우인 딸 장나라(28)를 한류 스타로 키우는 데 일등 공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주호성씨는 장나라의 신인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뒷받침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장나라는 최근 SBS 오락프로그램 ‘야심만만2-요지복통 유.치,장’에 출연해 아버지 주호성씨를 한때 미워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장나라는 녹화장에서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파파걸’이라는 주변의 오해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고백했습니다. 장나라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 말했지만, 주변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자꾸 듣다보니, 한때 아버지가 미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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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성씨


최근 장나라 아버지 주호성씨가 월권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주씨는 영화 '하늘과 바다'흥행 실패와 관련해 딸인 장나라 공식 홈페이지에 교차상영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영화에 참여했던 유아인이 9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영화가 투자 문제부터 스태프 교체, 임금 체납까지 잡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주호성씨의 월권에 관한 문제'라며 '주호성님이 촬영이나 편집에 있어 지나치게 관여했고 촬영장에서 메가폰을 잡고 지시를 하기도 했다'는 글을 남기며 월권했다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월권의 비판을 받은 주씨는 11일 오전 '유아인군의 글은 거짓이다. 한 번도 월권을 하거나 메가폰을 잡은 적이 없다. 왜 이런 글을 남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유아인군이 촬영시간 준수에도 상당한 결함이 있었고, 시사회나 홍보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옛말에 '과하면 안한 것 보다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밝고 맑은 장나라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만사형통 하십시요.^^
2009/11/11 16:43 2009/11/11 16:43

굿바이 박용오

사람, 사람, 그 사람 2009/11/04 23:09JBC - X파일
오늘 아침 뉴스 속보가 떴습니다. 박용오 전 두산 회장 사망. 박 전 회장이 1937년생이니,
한국 나이로 73세. 그가 사망했다는 속보를 보면서 '아직 작고할 나이가 아닌데, 무슨 지병이 있었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지병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순간 자살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박 전 회장은 자살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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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객들에게 고개숙이는 유족들.

  박 전 회장의 죽음에 대해 추호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왜 하필 자살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재계 총수까지 자살을 하다니, 도대체 그 자살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 생각해봤을까.
 박 전 회장은 대한민국 최고 로열패밀리이지 않습니까. 사실 태어났을 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봤을까요.
  아시다 시피, 박 전 회장은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둘째 아들입니다. 박 전 회장은 이른바 '로열 패밀리'에서 태어나 경기고, 뉴욕대 등을 졸업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습니다.
경력도 화려합니다.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이사,  동양맥주 사장, 두산상사 회장등을 거쳐 1996년부터 두산그룹 회장 직을 맡았습니다. 2005년에는 두산그룹 명예회장 직에 올랐습니다.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그의 자살도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형제의 난'도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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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전 회장은 2005년 두산가의 삼남인 박용성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된 데에 대한 반발하면서 '형제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자신의 큰 형, 현 박용곤 명예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동생 박용성 회장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자 박 전 회장은, 이사회 하루 전 날 '두산 그룹 경영상 편법 활용'이라는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형제의 난' 발단이 됐습니다.
 동생인 박용성 회장은 이에 대해 박 전 회장이 가족 모두에 대한 반역을 저질렀다고 공개적 공세를 취하는 등 입지를 고립시키며 심리적 압박을 가했었습니다. 이후 형제의 난은 박 전 회장이 지난해 3월 건설업계 50위 권의 성지건설을 인수하면서 공식적으로 정리됐습니다. 박 전 회장은 지난 2005년 '두산 형제의 난'으로 그룹은 물론 가문으로부터 제명됐습니다.
 그는 지난해 성지건설을 인수해 아들과 함께 경영을 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띄었으나 이 역시 글로벌 경제위기 등에 따른  자금난으로 결국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A4 용지 7장 분량의 유서는 박 전 회장이 직접 볼펜으로 쓴 것으로 보이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됐습니다.
 유서에는 "회사경영이 어렵다, 채권 채무 관계를 잘 정리해 달라"는 글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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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오 전 회장이 김수환 추기경 조문하는 모습/연합뉴스

   
  "회사가 어렵다"는 그의 유서를 보면서 쓴 웃음마저 나오더군요. 박 전 회장이 누굽니까.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성격인 그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도 역임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렵고 힘들어 자살했는지 모르지만, 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회사가 어렵다고 자살, 벌써 나 같았으면 열번도 더 자살했겠다"
 아마도 이땅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들도 다 제 친구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들은 반문합니다. 그래도 죽지 않는 이유가, 아니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의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고 반문합니다. 가족, 회사, 그리고 국가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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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사람은 "돈 많아도 자살하구나"라며 놀라워 하며 허탈해하더군요. 자신은 돈만 있으면 절대 죽지 않겠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박 전 회장의 자살은 좁은 집에서 오늘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 땅의 서민들에겐 큰 허탈감을 줍니다. 이는 박 전 회장만이 아닙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자살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서민들 입장에선 돈과 지위가 있으면 남부러울 게 없는데 왜 자살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허나 자살은 절망감과 불행감, 외로움 등에 따른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선택한다고 합니다.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일수록 이런 절대 고독에 빠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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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명인사는 일반인보다 소외감이나 절망감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듯이 보여도 속을 들여다 보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회적 지위나 재력, 외모가 ‘행복’을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겠죠.
 자살을 하면 자살자는 동정심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런 동정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살한 사람이 어리석었다는 인식은 영원히 남습니다. 자살은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을 하는 자신은 번민을 탈피할 수 있겠지만 뒤에 남은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자살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박 전 회장의 자살은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암튼, 제발 자살하지 맙시다. 자살을 거꾸러 읽으면 '살자'입니다. 삽시다.
  박 전 회장의 명복을 빕니다.  
 

2009/11/04 23:09 2009/11/04 23:09
"이왕표 잡으러 왔다."
 야수 밥 샙이 진짜 이왕표를 잡았네요. 밥 샙은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고 김일 추모 프로레슬링대회 '포에버 히어로 4' 메인매치에서 이왕표와 맞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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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룰로 진행된 시합에서 이왕표가 드롭킥과 각종 고난위도 기술을 구사하며, 기선을 제압했으나, 경기 시작 6분이 지난 시점에서 초청 선수인 레더페이스가 철재의자로 이왕표의 머리를 가격, 분위기가 급반전됐습니다.
 이왕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밥 샙은 드롭킥을 가격했고, 이왕표는 그 상태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경기후 계속 두통을 호소한 이왕표는 27일 새벽 서울 강서구 신월동 오승재 정형외과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이날 오후 병원에 입원중인 이왕표 면회를 갔습니다. 목 깁스를 하고, 링겔 주사를 맞고 있는 이왕표에게 다가가 "밥 샙 말대로, 진짜 잡혔네요"라고 하자, 이왕표는 "잡혔어, 잡혔어"라며 허허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왕표는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며 스승인 김일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김일 선생은 말년 프로레슬링 경기로 인한 후유증으로 14년간 병실에서 생활했습니다.
 입원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왕표는 "병원이 너무 갑갑하다. 14년간 병원에서 지낸 스승의 고초를 알 것 같다"며 손을 절레 절레 흔들었습니다.
 화제를 돌려, 밥 샙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밥 샙의 인기가 너무 좋다고 하자, 이왕표는 "프로레슬링 뿐만 아니라 예능자로서도 대성할 자질이 있다"고 추켜세웠습니다.
  최근 밥 샙은 ‘개그콘서트’를 비롯 각종 오락프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큰 덩치와는 달리 해맑은 눈망울로 귀여운 표정을 짓고 킹콩 포즈를 취하는 등 예능끼와 다양한 매력을 펼쳐보였습니다.

 

 밥 샙을 처음 본 것은 지난해 11월 이었습니다. 이왕표와의 경기에서 패한 후 밥 샙은 비난 여론에 시달렸습니다. 팬들이 각본설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 도쿄로 출국하기 전 밥 샙을 만났습니다. 제기됐던 승부 조작설과 관련, 밥 샙에게 "사전 각본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라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밥 샙은 “각본이라니?"라고 반문한 뒤 "절대 없었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밥 샙은 “내 패전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마 경기 진행이 일반적인 MMA 경기와 달라서 팬들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밥 샙은 패전 이유에 대해 “나는 원래 프로레슬링 룰로 경기를 치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5일 한국에 입국해서야 MMA 룰이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고 언급했습니다. 밥 샙은 자존심이 무척 상한 듯 이왕표와의 재대결을 강력히 원했습니다. 결국 그는 재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경기장만 벗어나면 밥 샙은 한마리의  '양' 처럼 온순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처럼 느껴졌습니다. 뭐~ 밥 샙이 좋은 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밥 샙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정말 '야수'인지 의아심이 들 정도 입니다. 밥 샙은 순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매사 진지 했습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앉는 자세가 불량하다 할 정도. 그는 정 자세로 앉아서 식사를 못했습니다.
 


한쪽 손과 팔은 바닥을 짚고, 몸은 벽을 기대 챈 60도 정도 옆으로 숙입니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본 사람은 "저런 싸가지 없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200cm, 170kg 그의 신체적 조건을 생각해보세요. 정상적으로 앉아서 밥 먹는게 그에겐 고문 일것입니다. 애초 테이블이 아닌 룸을 선택해서 밥을 먹은 우리들의 잘못이죠.
  만사형통 하십시요.
2009/10/27 20:03 2009/10/27 20:03
 지난 17일 토요일 오후 홍대 서교호텔에서 엑스재팬(X-JAPAN) 보컬 토시(44·Toshi)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토시가 누구냐고요. 토시는 유럽 스타일의 빠른 메탈록과 동양적인 선율로 일본 대중음악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록그룹 액스 재팬의 멤버 입니다.
 토시는 처음 만났습니다. 토시에 대한 첫 느낌은 "참 친절하고 매너가 좋다"였습니다. 토시는 저녁 식사중 자신의 신곡을 선물하기 위해 직접 호텔 방까지 가서 CD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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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오른쪽)가 자신의 신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녁 식사 때 나온 메뉴를 보고, 어떻게 요리하는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또 상대방 얘기는 끝까지 경청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곤 했습니다.
 그와의 저녁 식사때 메뉴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된장찌개, 김치, 나물, 다양한 전 등 순전히 한국식 이었습니다.
 토시는 여느 스타들 처럼 도도하고 잘난 척 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주 순수했고, 친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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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왼쪽이 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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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토시(왼쪽서 두번째)와 기념촬영.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토시가 일본 대중 음악계의 신화적 존재로 군림했던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엑스재팬에 대해선 잘 알지만, 그 멤버 중 한명인 토시에 대해선 얘기만 들었지 잘 몰랐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키는 168cm, 체중 48kg.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죠.  '그 조그만 체구에서 메탈 록이 나온다---?'고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토시는 1991년 제5회 일본 골든디스크 뮤직비디오상, 1990년 일본 유성음악대상 우수 음악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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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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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 때 토시.      출처=네이버

 이날 저녁 식사 후 토시는 서울 한강시민공원 난지지구 잔디마당 특설무대로 달려갔습니다.  '2009 대한민국 라이브 뮤직페스티벌'에 특별 게스토로 초청돼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 였습니다.  
  내친김에 토시 일행들과 함께 난지도 공원 공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토시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죠. 토시는 저녁 9시 10분경 무대에 올랐습니다.
  전날에 비가 온 탓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추웠습니다. 헌데, 토시의 팬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라이브 가수들이 출연하자 수천명의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위로 뛰면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깐, 추위는 젊음의 열정속에 녹여드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토시의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세곡을 불렀습니다. 토시의 강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자 귀가 멍 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강시민공원에 저렁저렁 울렸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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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창하고 있는 토시.
 

그의 공연을 보면서 토시가 왜 이 무대에 섰을까 생각했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많은 스태프 속에 최소한 10만명 이상 관객들 앞에서 섰던 그가 토시 아닙니까. 그런데 순전히 라이브를 좋아하는 한국의 팬들을 위해 야외무대에 선 토시 였습니다. 


   팬들에 웃고 있는 토시.      출저=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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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들은 얘긴데, 전성기 시절 토시는 여간 깐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가수 중의 한명었다고 합니다. 그는 소위 로마의 황제 같았다고 합니다.
 먹는 것 빼놓고 모든 건 비서격인 사람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 종교 세계를 알면서 대중들과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흔한 말로 요즘 그는 한 사람의 팬이라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다면 달려가  부른다고 합니다.
 자선공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가 한강시민공원에서 노래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팬들이 원했기 때문에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참고로, 토시는 지난해 1월 한국 공연 수익금을 기름 유출사고를 겪은 충남 태안 주민을 돕는 성금으로 기탁했습니다.
 토시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파이팅 토시^^

 
2009/10/24 08:37 2009/10/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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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TV가 등장한 60년대.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국민들의 상처를 씻어주는 '영웅'이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박치기 왕' 고 김일 선생 입니다.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숱한 감동을 안겨줬던 김일 선생은 2006년 10월 26일 작고했습니다. 현재 김일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영면해 있습니다.

 

 생가를 가다

지난 8일 김일씨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김일 선생 후계자 이왕표 등 레슬링 관계자들과 함께 갔습니다. 묘도 찾았습니다. 김일 선생 생가와 묘를 간 것은 오는 26일이 3주기인데다, 전남 고흥군 어전리에 김일 선생을 추모하는 체육관이 건립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전남 고흥군은 지난달 24일 김 선생의 고향인 금산면 어전리에서 김일 기념체육관 건립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국비 등 40억 원이 투입되는 이 체육관은 건축 연면적 2200m²(약 660평) 규모로 전시관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체육관 안에 설치되는 기념관에는 김 선생이 생전 경기 때 입었던 옷과 챔피언 벨트, 우승컵, 경기 사진 등이 전시됩니다. 생전 경기 모습 등을 보여주는 영상관도 마련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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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표 초대 못받아

문제는 이런 뜻깊은 기공식에 후계자 이왕표는 물론 프로레슬링 제자 등 한명도 초대 받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김일 선생 자서전을 냈습니다. 제목은 '굿바이 김일' 입니다. 그 자서전 발간을 위해 거의 1년 동안 김일 선생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생가도 3번 갔다 왔습니다. 그 책은 김일 선생 작고 후 한달 만에 발간됐습니다. 일본서도 출판 됐습니다. 일본서 가장 큰 고단샤 출판사에서 발간했습니다. 2006년 12월 일본서 출판기념회도 개최했습니다. 김일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저도 기공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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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추억
 
지난 8일 김일 선생 생가를 향하면서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 처럼 스쳤습니다.  2006년 2월 김일 선생을 승용차에 태운 후 전남 순천시내를 가로지른 후 벌교를 지나 고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초행일수밖에 없었던 저는 길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런 것을 짐작했었는지, 김일 선생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조그만 가면 벌교 상고 앞입니다. 저기서 좌회전을 잘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네비케이션 노릇까지 했습니다.
 승용차가 고흥군에 진입하자 "과거 비포장 도로라 고흥 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면 버스가 하도 쿵딱 쿵딱 뛰어 마치 탱크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며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김일 씨의 가이드를 받으며 부산을 출발한 지 5시만인 오후 6시 마침내 고향인 고흥군 녹도항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거금도였습니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20분 가량 들어가야 했습니다. 배 시간에 맞춰 한 장어구이 식당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 8시 배를 타고 생가가 있는 거금도에 도착했습니다. 언제 다시 올 지 알 수 없는 고향집에 다다르자 감정이 복받치는 듯 얼굴에선 무상함이 묻어났습니다. 생가에는 50여장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만이 지난 시절 화려했던 김일 선생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역도산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제 나도 얼마 안있으면 저 분 곁으로 가겠지"라며 역도산을 너무 그리워 했습니다. 그는 고향 산을 바라보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듯' 레슬링을 하면서 남긴 모든 것은 사회로 되돌려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국민이 있었기에 김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속의 김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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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땅 묘

특히 김일 선생은 죽어도 고향땅에는 묻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김일 선생은 고향땅에 묻혔습니다.  서울서 그 고향은 너무나 멀었습니다. 8일 오전 5시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고흥에는 11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생가까지 1시간 더 소요됐습니다. 국민 영웅 김일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게 멀었습니다. 일반인들이 큰 마음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김일 선생 생가와 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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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 선생 묘를 둘러본 후 그 뒤 생가 기념관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 생가 기념관에서 김일 선생과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김일 선생의 사진과 유품이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했습니다.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고흥군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지난 3년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어이없었습니다. 누가 열쇠를 관리하는 지 물었습니다.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3년전 김일 선생과 생가를 방문했을 때 김일 선생이 소장중인 많은 기념품과 사진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습니다. 집안에는 매캐한 냄새와 사진에는 곰팡이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함께 간 이호형 기자와 함께 큰 맘 먹고 사진 정리와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후 지금까지 생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고흥군 관계자에게 부탁합니다. 김일 선생 기념관 건립도 중요하지만 현재 있는 기념관이라도 제대로 관리해달라고. 헌데 고흥군 관계자는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기념관은 가족 명의로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허락 받지 않고 문을 열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김일 선생이 살아 생전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금산면 사무소에서 등기부대장을 확인해 봤습니다. 소유자 김일, 김해 김씨 종친이었습니다. 생가는 종친 소유라는 김일 선생 말이 맞았습니다.
 10월26일 3주기 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2009/10/13 16:39 2009/10/13 16:39

"국기에 대한 경례! '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무궁한 영광을 위하여---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이어서 애국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일동 묵념~! 장내 묵념 음악 소리 30초간 흐름"
 무슨 행사일까요. 아마도 국가 산하기관 행사일 것으로 짐작할 것입니다. 허나, 블로그 제목만 보고 들어왔다면 축구 행사인 것 같은데...라고 짐작도 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축구 행사  맞습니다. 아마도 K리그 구단 행사일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힌트를 하나 준다면 이 행사에서 묵념할 때 나온 사회자 멘트 입니다.
 "축구를 하다가 먼저 가신(작고) 선배들과 순국 선열들"이었습니다.
 조기축구회 송년회 입니다. 프로축구 송년회는 이런 멘트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올해의 스타와 비스타 선수들간의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연출되곤 하죠. 그러나 조기축구회 송년회에선 스타도, 비스타도 없었고, 따라서 희비가 엇갈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웃고, 즐기고, 훈훈한 정이 흐른 자리였습니다.

 < 아래 사진이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모습입니다. 오른 손을 가슴에 올린 모습에서 애국심이 묻어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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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리그 시상식 혹은 송년회 가면 유명 가수들도 등장합니다. 노래로 흥을 돋굽니다. 조기축구회 송년회도 초청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국악 마당이었죠. 회원 중 한명이 난타 출신 입니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서 국악 학원을 운영중인 분이죠.
 이 분은 지난 11월 중순 경기도 양평 원정 경기를 갔다가, 팔이 뚝 했습니다. 수비수였던 그는 그날 따라 골키퍼로 변신했습니다. 헌데, 무리하게 공을 잡다가, 뼈에 금이 간 거죠. 그 분은 두르려야 돈 버는 사람입니다. 즉, 북을 쳐야 하는 분이죠.
 연말 행사는 가지 못했지만, 그는 조기축구 송년회를 위해 몸을 불태웠습니다. 그 아픈 손으로 북도 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멤버들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조기축구 송년회에서 공연 하는 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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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들은 그 분의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그로 인해 조기 축구회 송년회는 그 어떤 프로구단 송년회 부럽지 않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공연에 넋이 빠진 회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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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저는 직업상 각종 스포츠 단체 송년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대부분 송년회라면 부어라, 마시라 그리고 비틀거리죠. 허나, 이날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마시면서 즐겼지만 저녁 9시 되면서 행사를 종료했습니다.
 이날 한 회원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조기축구회가 살면 대한민국 축구도 산다" 축구 대중화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축구회가 활성화 되면 대중화는 쉽게 눈 앞에 옵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조기 축구회원들은 축구 대중화의 밀알 들일 겁니다.
 혹시라도 내년 훈훈한 조기축구회 송년회 오실분은 매주 일요일 8시 서울 성북구 성북동 홍익고등학교 운동장으로 오세요. 춥다고 움추리지 마시고, 운동장으로 달려오셔서 땀을 흘려보세요.
 꼭 ,이 축구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네 축구회도 노크, 땀흘리세요. 축구가 아마도 지친 당신의 몸과 맘에 활력을 불어넣을 줄 겁니다.
 
 


 

2008/12/26 20:15 2008/12/26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