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9/11/02JBC - X파일"김정일 가짜다" 시게무라 교수 이제 그만합시다.
  2. 2009/08/07JBC - X파일클린턴이 만났던 김정일은 가케무샤?(대역)
  3. 2009/06/18JBC - X파일아시나요! 북한 루니 정대세 뿌리가 경북 의성(2)
  4. 2009/06/14JBC - X파일굿바이 미사와, 그리고 이왕표(3)
  5. 2009/01/05JBC - X파일이 놈 공개 수배(10)
  6. 2008/12/11JBC - X파일역도산을 추모하며(4)
    시게무라 교수 툭 하면 김정일 가게무샤(대역) 제기
 
이번에는 미국 ABC방송 인터뷰서,  새로운 사실없고, 황당한 팩트뿐


미국의 ABC방송 인터넷판은 1일 서울발 기사에서 또다시 이러한 김 위원장의 대역에 관한 주장들을 정리해 보도하면서 지난 8월 북한에 억류됐던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가짜 김정일'을 만났을 수도 있다는 한 일본 교수의 주장을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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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마이니치 신문 기자출신으로 현재 와세다대 교수인 시게무라 도시미쓰는 김 위원장이 2003년 사망했을 수도 있으며 현재 공식 행사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대역(가게무샤)이라고 주장, 국내 언론에서도 이런 주장이 몇차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김 위원장 사망과 대역 근거로 △2004년 1월부터 3개월 가량 김정일 근황에 대해 불분명한 보도만 계속됐고 △사망 전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3년 북핵 6자 회담 등 굵직한 외교적 결단을 내렸으며 △일본 방송이 4년 전 그의 목소리와 현재 목소리를 분석해 본 결과 다른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점 등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시게무라 교수는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4월5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 후 최고인민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야위고 병약한 모습의 인물이 진짜 김 위원장이라면 8월에 클린턴 전 대통령과 만난 사람은 대역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8월에 클린턴 전 대통령과 나란히 앉은 모습의 사진속 인물이 무척 건강해 보인다는 점을 들어 "(4월과 8월 행사에 모습을 나타낸) 두 인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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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시게무라 교수는 3시간17분 동안 진행된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면담에 나온 사람은 연기에 능숙한 김 위원장의 대역으로 의심된다면서 특히 최근 평양을 방문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 현대아산의 현정은 회장도 대역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시게무라 교수는 김 위원장의 대역을 만나 본 적이 있는 일본인들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그 가운데 프린세스 덴코라는 이름의 마술사가 평양을 몇차례 방문하면서 김 위원장의 대역을 만났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덴코라는 마술사에 대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 김 위원장을 만났고, 그 마술사가 2000년 초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난 김 위원장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 마술사 집에는 김 위원장과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다. 2000년 사진의 김위원장은 병색이 완연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마술사는 김 위원장의 자녀들과도 절친한 사이다. 마술사는 한 자녀에게 ‘혹시 (김위원장이) 돌아가시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마술사는 2003년 초 평양 발신인 꽃다발 하나를 배달받았다. 꽃다발은 미리 정한 ‘김위원장 사망’이라는 암호였다”고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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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연합뉴스

 앞서 저는 지난 8월 블로그에 시게무라 교수의 주장을 인용한 이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시케무라 교수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03년 초에 당뇨병이 악화돼 사망했고 그 뒤 '대역 1호'가 활동했다고 합니다. 2003년 9월부터 지금까지는 '대역 2호'라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대로하면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났던 김 국방위원장은 대역 2호인 셈이죠.
   김 위원장은 2000~2003년에 남북정상회담 등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3년 이후에는 ‘김정일다운’ 결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02~2003년 북한에선 후계자 옹립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김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했다는 방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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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북도 수풍발전소를 시찰하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 /
                            연합뉴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진짜 대역이라면 여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니다. 북한이 워낙 폐쇄적이라 각종 설이 난무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정보력은 대단합니다. 그 정보력만으로 대역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게무라 교수의 주장이 약간 황당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더 합니다. 그는 새로운 팩트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난 2003년 이후 그의 정보는 더이상 새로운 게 없습니다. 맨날 김정일은 가게무샤다라는 앵무새같은 이야기만 반복합니다.
 일본의 한 대북 전문기자는 "시게무라 교수가 약간 튀는 언행을 많이해 그의 신빙성에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만사형통 하십시요.
2009/11/02 11:15 2009/11/02 11:15


가케무샤 김정일






 최근 일본에선 지난 4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났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가케무샤(대역)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자 중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5년 전인 2003년에 사망했으며 지금 와병설이 도는 김정일은 대역이다’
 
 지금부터 사진을 비교해보세요. 일본 학자의 주장이 황당하기도 하고, 또 일리 있기도 하고,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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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 사망과 대역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일본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 시게무라 도시미쓰(64) 일본 와세다 대학 교수 입니다.

그는 김 위원장 사망과 대역 근거로 △2004년 1월부터 3개월 가량 김정일 근황에 대해 불분명한 보도만 계속됐고 △사망 전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3년 북핵 6자 회담 등 굵직한 외교적 결단을 내렸으며 △일본 방송이 4년 전 그의 목소리와 현재 목소리를 분석해 본 결과 다른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점 등을 제시했습니다. 


                                시케무라 교수
                                


 

 시케무라 교수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03년 초에 당뇨병이 악화돼 사망했고 그 뒤 '대역 1호'가 활동했다고 합니다. 2003년 9월부터 지금까지는 '대역 2호'라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대로하면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났던 김 국방위원장은 대역 2호인 셈이죠.
 
 김위원장은 2000~2003년에 남북정상회담 등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3년 이후에는 ‘김정일다운’ 결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02~2003년 북한에선 후계자 옹립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김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했다는 방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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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전대통령과기념촬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케무라 교수 주장대로라면 김 위원장은 대역 2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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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0일 평양방직공장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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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직공장을  방문, 오른손을 사용해  원료를 만져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대역이라면 여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니다. 북한이 워낙 폐쇄적이라 각종 설이 난무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천국이 어쩌고, 지옥이 저쩌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2009/08/07 16:32 2009/08/07 16:32

   
                      정대세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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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 할아버지, 아버지 본적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운곡리
정대세 국적 조선(북한)으로 추정, 민족 가족사 비극   

  
'아시아의 웨인 루니'  정대세(25.가와사키). 원톱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북한의 공격을 이끈 정대세는 일본 프로축구에서 올 시즌 6골을 터뜨린 골잡이 입니다. 북한 축구가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정대세 활약이 컸습니다.
 정대세는 재일동포 3세 입니다. 그런 정대세의 '뿌리'가 남한인 것을 아십니까.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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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세(왼쪽)가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파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B조 8차전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와 경기에서 공중볼 다툼을 하고 있다.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AFP연합 
   

경북 의성군 금성면 운곡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운곡리.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은 가난한 농가가 많았습니다.  먹을 거, 입을 것 조차 없었던 당시 정대세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농사 일을 했습니다.
 정대세 할아버지 이름은 정삼출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대세 조부 정삼출씨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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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금성면 운곡리 마을 전경
 

 이 마을 김윤호옹(87)은 "정삼출은 1930년 초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정삼출씨가 일본으로 건너 간 이유에 대해 김옹은 "당시 먹을 거, 입을 거 조차 없던 너무 가난한 시절이라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 갔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마을 김태환씨(76)는 "정삼출씨 형님 친,인척들도 운곡리에 살았지만 지금은 살지 않는다. 소문에 의하면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사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정삼출씨가 출생한 곳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이랍니다. 정삼출씨는 열댓살 쯤 운곡리로 이사왔다고 했습니다.
 정삼출씨 본관은 동래 정씨 입니다.  운곡리에는 동래 정씨 사당이 있을 정도로 동래 정씨가 많이 살아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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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마을 이장이 정대세 할아버지 정삼출씨가 운곡리로 이사 왔을 때 살았던 집을 가리키고 있다.

  정대세 조부 정삼출씨가 처음 정작했었던 집은 꽤 컸습니다. 그런데 가세가 기울면서 그 집은 팔고 100여 미터 떨어진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사 갔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회고입니다. 정삼출씨가 1930년초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다는 집은 아직도 보존돼 있습니다.
 운곡리 이장 김원호씨(58)는 "정삼출씨가 처음 정착했던 집은 슬레트가 지붕이 덮여져 바뀌었지만, 두 번째 살았던 초가집은 원형 그대로"라고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운곡리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유별나게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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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대세 할아버지 정삼출씨가 일본으로 건너 가기 직전까지 살았던 농가 .


  사진=정대세 할아버지 정삼출씨가 일본으로 건너 가기 직전까지 살았던 농가 .
 

   뿌리는 원곡리, 국적은 조선, 출생지는 일본
  마을 사람들은 정대세가 북한 선수로 뛰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금성면사무소에서 정대세 부친 정길부씨 호적등본과 제적등본을 확인해 본 결과 본적지가 경북 의성군 운곡리 였습니다.
 그러나 정길부 출생지가 일본 애지현 동춘승군 고장사정 대자출천 2167번지 입니다. 정대세 부친 정길부씨는 이곳에서 1941년 2월22일 출생 했습니다.
 정길부씨는 1984년 3월 리정금씨와의 사이에 정대세를 낳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호적에는 아내와 자식이 등재됩니다. 그러나 정씨의 호적에는 리정금씨와 정대세가 등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호적에는 부친 정길부와 조부 정삼출씨만 등재돼 있습니다. 정대세가 한국 호적에 등재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은 정대세가 모친 리정금씨의 국적인 조선(북한)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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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세는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습니다. 문제는 일본 정부는 북한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선을 국적으로 선택한 일본 교포들은 현재 '무국적자' 입니다.
 만약 정대세가 모친을 따라 조선 국적을 선택했다면 현재 무국적자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거나 정대세는 한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우리 민족의 후손입니다. 정대세 뿌리는 남한, 그러나 현재는 북한 국가대표. 그리고 일본서 출생. 그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을 거친 우리 민족의 비극적 가족사의 한 단면이고 합니다.
 
  정대세 형을 만나다
 
 하나 더 알려드리죠. 정대세 형은 한국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험멜코리아에서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는 정이세(27) 입니다. 두 달 전쯤 정이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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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세 형 정이세. 촬영= 양광삼 기자  
 

그에게 "당신의 뿌리가 경북 의성군 운곡리란 사실을 아는가"물었습니다. 그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뿌리를 한번 찾아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는 남한이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경북 의성까지는 모른다. 기자 분은 어떻게 그걸 알았냐"며 놀라워 했습니다.
  정이세는 지난해 10월 한국에 왔습니다. 정이세는 동생 대세와 함께 아이찌 조선 제이 초급학교 4학년부터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일본 고등교육 자격이 필요한데 자격이 안돼 하고 싶어도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어쩔 수 없이 축구를 그만 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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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세가 손으로 공을 쳐내고 있다. 촬영=양광삼 기자


 4년 동안 축구를 그만 두고 배관사업을 하는 어버지 가업을 이었지만 마음 속 축구의 열망까지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온 것이니다. 한국에 온 것은  오직 '축구'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국적이 남한이면 어떻고, 북한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진정한 한민족의 후손입니다. 44년만의 북한 월드컵 진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진=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딴 뒤 자기 팀 코치를 헹가레치고있는 북한 축구팀선수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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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10:42 2009/06/18 10:42

굿바이 미사와, 그리고 이왕표

X파일 2009/06/14 19:39JBC - X파일
굿바이 미사와 미츠하루

역도산, 김일-이왕표, 자이언트 바바-미사와

 14일 새벽 인천 을왕리에 있었습니다. 이날 12시 30분쯤 일본의 한 지인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정상! 미사와 작고했습니다."  취기가 오른 상태라, 처음엔 누가 작고 했는지 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노아 대표 미사와!"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술이 '확' 깨더군요. 미사와 미츠하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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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사와 사망을 보도한 일본 신문 캡처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재건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다 링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미사와는 13일 오후 8시45분께 히로시마시 중구 현립종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노아 히로시마' 메인 이벤트를 하던 중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습니다.
                                  
미사와의 추억

 미사와는 특별한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06년 3월초 박치기왕 김일, 후계자 이왕표 등과 함께 일본을 갔습니다. 당시 미사와가 대표로 있었던 '노아'도 방문했습니다.
   그 때 미사와를 처음 만났습니다. 우직하고 무뚝뚝하게 보였던 미사와는 김일 선생님을 깍뜻한 예의로 맞이했습니다.  허리를 90도 숙이고 인사 하고, 김일 선생님 건강에 대해 묻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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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생젼 김일(왼쪽)과 미사와의 모습. 두사람은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다 지금은 고인이 됐다. 사진=이호형 기자

 
 미사와는 김일 선생님에게 노아 직원을 소개시켰고, 노아를 구경시켜 줬습니다. 미사와가 왜, 김일 선생님에게 깍뜻한 예의를 갖췄을까요. 프로레슬링 원로에 대한 예우라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사와가 예의를 갖춘 것은 일본프로레슬러 정통성에 대한 대우라 생각됩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죠.
 일본 역대 프로레슬러 중 최고 영웅은 1963년 12월 작고했던 역도산 입니다. 함경도 출신인 역도산은 조선인입니다. 참고로, 제 블로그 '역도산을 추모하며'를 읽어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맨 마지막에 그 글이 있습니다>

역도산과 세 명의 영웅  

역도산 다음으로 세명의 프로레슬링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오오키 긴타로로 불렸던 박치기왕  김일, 두번째가 요미우리 투수 출신 자이언트 바바, 그리고 안토니오 이노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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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일(가운데 벨트 찬 사람)이 자이언트 바바(왼쪽)와 안토니오 이노키(오른쪽) 등과 함께 우승 기념 건배를 하고 있다. 세 사람은 역도산 사후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이었다.


그 다음 영웅 계보도 있지만 일본선 미사와 만한 영웅은 없었습니다.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러 중 의리와 신의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1963년 12월 역도산 작고 후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는 역도산 정통성을 이어받은 전일본프로레슬링 단체와 이노키가 새롭게 만든 신일본프로레슬렁 단체로 양분됐습니다.
 전일본프로레슬링 대표가 자이언트 바바였습니다. 현재 노아는 전일본프로레슬링 후신인 셈이죠. 말하자면 노아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의 정통성을 이어온 인물 입니다.
  한국에선 이왕표가 김일 선생의 후계자이듯, 일본에선 노아의 미사와가 자이언트바바 후계자로 불립니다.  미사와가 일본서 역도산 정통성과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면, 한국에선 이왕표가 역도산 정신과 정통성을 이어온 것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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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 프로레슬링을 상징하는 이왕표(왼쪽)와 미사와. 두 사람은 역도산 정신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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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일이 자이언트 바바를 향해 몸을 날리며 박치기 하고 있다.

 사진설명:이왕표는 김일의 후계자였고, 미사와는 자이언트 바바의 후계자로 불렸다. 사진은 김일이 온몸을 날려 자이언트 바바에게 박치기를 하고 있다.


                   이왕표와 미사와

이왕표 레슬링 군단과 미사와 레슬링 군단이 매년 프로레슬링 교류를 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미사와는 K1과 각종 격투기 등장으로 인해 일본서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점차 떨어졌지만 그는 한 눈 팔지 않았습니다. 오직 프로레슬링 한길만 걸었습니다. 이왕표도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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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난해 11월 밥샵을 꺽은 이왕표가 관중들을 항해 포효하듯 환호하고 있다.


그건 바로 역도산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신 때문 입니다. 미사와는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가 각종 격투기 경기를 만들어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거부했습니다.
  바로 노아에는 조선인 역도산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역도산이 무슨 관계냐고요..?
 '노아'에선 유명한 여성 프로모터가 있습니다. 이름은 레미 모모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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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역도산 친손녀 레미 모모타. 노아의 프로모터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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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역도산 둘째 아들 미치오 모모타, 친손녀 레미 모모타. 레미는 미미오 딸이 아니다. 레미 아버지는 역도산 첫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이호형 기자


 그녀는 역도산 친손녀  입니다. 그리고 역도산 둘째 아들 미치오 모모타가 노아의 부사장 입니다. 또 1958년 김일 선생의 첫 데뷔 상대였더던 조히구치가 노아의 고문입니다.
 
 
굿바이 미사와

 미사와 사망은 한 일본 프로레슬러의 단순한 사망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미사와는 조선인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정신을 계승하고, 프로레슬링 부활을 온 몸을 불사르다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미사와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의 영광을 재현하겠다---" 이왕표도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과 김일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프로레슬링 의 영광을 재현하겠다---" 
     다시한번 미사와 명복을 빕니다.  굿바이 미사와!!!

      -다음은 지난해 역도산을 추모하며 올린 글-.
 12월15일은 무슨 날일까요. 결혼기념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그리고 생일과 추모일 등.
 12월 15일이 기념일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격투기를 좋아하는 올드팬들은 12월15일이라면 그 때 그 사건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인 보다 일본인이 이 날을 더 기억하겠죠. 이날은 재일한국인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 칼에 찔려 죽은 날 입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8일 야쿠자 칼에 찔렸고, 일주일 뒤인 15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본에서 12월15일만 되면 역도산 추모일이라 해서 특집 방송이 편성되고, 언론도 이에 대한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역도산이 사망한 지 4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속의 일본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 바로 역도산이었습니다.
 가라데 하나로 서구의 레슬러들을 때려 눕혔고, 역도산은 강인함 그 자체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 무엇보다 국민의 단합과 강인함이 요구됐던 시절, 역도산 등장은 패배 주의에 젖었던 일본인들에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당시 일본 어린이들은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역도산이 얼마나 일본서 유명했는지 알 수 있죠.
  저는 2005년 말, '박치기 왕' 김일 선생 살아 생전 그의 구술을 받아 <굿바이 김일>이란 책을 2006년 12월 출간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저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김일 선생의 업적을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일 선생의 스승, 역도산의 영웅담도 전해들었고, 그의 생애와 업적도 재조명 했습니다.
 저는 역도산에 대해 대충 알았던 시절, "역도산은 친일파였다"라는 사실을 각종 책과 언론 자료를 통해 알았습니다.
 역도산이 친일파가 된 것은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역도산은 함남 출생입니다.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선어(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가 그를 친일파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모르는 소리입니다. 역도산이 친일파다 아니다란 논의자체가 거북스럽지만, 역도산에 대해 광범위하게 취재를 하고, 증언을 들었던 결과 역도산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란 견해입니다.
 역도산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역도산이 건너간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가 친일파일까요. 만약 지금 일본으로 출장을 갔거나, 여행을 간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일본어를 배워, 그 쪽 구석 구석을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당시 역도산은 15세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 15세는 중학교 2학년생입니다. 그 어린 소년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번쯤 내 동생 형이다 생각하고 떠올려 보십시요.
 그 일본 땅에서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역도산의 대변인도 변명인도 아니지만, 그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38세에 야쿠자 칼에 찔려 숨을 거둔 조선인 역도산을 다시 한번 재평가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조선인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박치기 왕 김일 선생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재일한국인 여건부 선수와 고트네 선수도 있었고, 1958년 동경 아시안 게임때 한국 선수 스폰서도 자처했습니다. 그 뿐입니다.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후원했고, 재일 야구 영웅 장훈 선생도 후원했습니다. 역도산은 재일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한국에 와서 1964년 동경올림픽 지원도 약속했고,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도 약속습니다. 나아가 남북 통일을 위한 통일 전사가 자처했습니다.
 국내서 개봉됐던 영화 <역도산>은 이런 역도산의 본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존 영화가 픽션이 가미됐다고 하지만 이는 역도산을 매도한 영화입니다. 이미 개봉관에서 사라진 영화에 대해 뭐라 비판하기가 때늦은 감은 있지만 김일 선생은 살아 생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진들이 나를 한번도 찾아 온 적이 없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김일 선생만큼 역도산 선생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을까요. 더욱 가관은 그 영화에서 김일 선생은 엔딩에서 나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도산이 칼에 찔린 후 스승님이라며 울부짖는 한 컷 입니다. 실제 상황으로 돌아갈까요. 김일 선생은 당시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서 세계프로레슬링 권좌에 올랐습니다. 또 그 영화를 보면 역도산은 완전 깡패같은 레슬러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화장실 입구서 야쿠자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역도산은 발을 한번 밟힌 이유로 야쿠자를 죽도록 패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노라면, 저라도 생명 방어차원에서 어떤 물체로 역도산의 폭행을 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건 기록을 보면 역도산은 야쿠자 조직원에게 무례하다며 빰 한대를 때렸습니다.
 헌데 영화에선 역도산이 얼마나 잔혹하게 야쿠자 조직원을 폭행합니까. 또 역도산이 아내의 뺨을 때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일본선 제 아무리 역도산이라 해도 아내를 폭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역도산 아내 게이코 여사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이 영화를 보면 감수자가 나옵니다. 그는 재일한국인이자 역도산 마지막 제자인 고트네 입니다.
 그는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 영화 관계자들을 혼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승을 그렇게 엉터리로 묘사할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습니다. 그는 "한국의 영웅 역도산을 한국인이 삼류 양아치로 만들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일본 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인은 역도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 한국인들은 역도산을 삼류로 만들었느냐고요? 이런 질문 받으면 민망합니다.
  이렇듯 역도산은 상업주의와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결합되면서 그의 삶의 업적과 철학, 생애가 철저히 왜곡돼 있습니다.
 12월15일. 이제 4일 남았습니다. 저는 이날만은 니시마고메엔 혼몬지 (本門寺) 묘역에서 외롭게 잠들어 있는 역도산을 마음속으로나마, 추모할 것입니다.  
   

 

2009/06/14 19:39 2009/06/14 19:39

이 놈 공개 수배

X파일 2009/01/05 23:31JBC - X파일
군포여대생실종 사건이 공개수사로 전환되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남성의 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 이 놈의 마스크낀 얼굴을 공개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진은  5일 안산상록경찰서는 지난달 19일 집을 나섰다 소식이 끊긴 군포시 대야미동에 거주하는 대학생 A양(21)에 대해 공개수사를 벌이기로 하면서 공개한 얼굴입니다.
  A양은 19일 오후 3시 7분께 군포 보건소에서 일을 보고 나선 후 소식이 끊겼으며 18일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족들은 19일 오후 11시30분께 경찰에 신고했으며 경찰은 실종 신고가 접수된 즉시 비공개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수사 결과 A양은 오후 3시 7분께 군포 보건소를 나선 후 5.2㎞ 가량 떨어진 안산시 건건동에서 오후 3시37분께 휴대폰이 끊겼으며, 이후 오후 7시30분께 안산시 성포동 농협 현금인출기에서 흰색 마스크를 착용한 20~30대 남성이 A양의 카드로 현금 70만원을 인출했습니다. CCTV에 잡힌 용의자는 20~30대 남성으로 보이며, 170㎝ 키에 보통 체격으로, 가발로 추정되는 산발머리와 노란계통의 자켓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놈 반드시 잡읍시다. 이런 놈 잡지 못하면 딸 가진 부모님들 다리 뻗고 주무시지 못합니다. 얼굴은 안 드러났지만 이 분의 모습을 봐서 " 어, 내가 아는 놈인데"라고 생각하는 분들
제보 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양해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들중에는 왜 기자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놈이란 표현을 쓰는지 기분 나
빠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욕해도,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놈에게 000씨로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개XX라고 욕해주고 싶은 놈입니다.
이 놈 우리가 잡읍시다. 잡으면 아구통을 한대 갈깁시다. 못 된 놈.
 
2009/01/05 23:31 2009/01/05 23:31

역도산을 추모하며

X파일 2008/12/11 21:59JBC - X파일

 12월15일은 무슨 날일까요. 결혼기념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그리고 생일과 추모일 등.
 12월 15일이 기념일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격투기를 좋아하는 올드팬들은 12월15일이라면 그 때 그 사건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인 보다 일본인이 이 날을 더 기억하겠죠. 이날은 재일한국인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 칼에 찔려 죽은 날 입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8일 야쿠자 칼에 찔렸고, 일주일 뒤인 15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본에서 12월15일만 되면 역도산 추모일이라 해서 특집 방송이 편성되고, 언론도 이에 대한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역도산이 사망한 지 4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속의 일본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 바로 역도산이었습니다.
 가라데 하나로 서구의 레슬러들을 때려 눕혔고, 역도산은 강인함 그 자체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 무엇보다 국민의 단합과 강인함이 요구됐던 시절, 역도산 등장은 패배 주의에 젖었던 일본인들에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당시 일본 어린이들은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 이름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역도산이 얼마나 일본서 유명했는지 알 수 있죠.
  저는 2005년 말, '박치기 왕' 김일 선생 살아 생전 그의 구술을 받아 <굿바이 김일>이란 책을 2006년 12월 출간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저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김일 선생의 업적을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일 선생의 스승, 역도산의 영웅담도 전해들었고, 그의 생애와 업적도 재조명 했습니다.
 저는 역도산에 대해 대충 알았던 시절, "역도산은 친일파였다"라는 사실을 각종 책과 언론 자료를 통해 알았습니다.
 역도산이 친일파가 된 것은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역도산은 함남 출생입니다.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선어(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가 그를 친일파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모르는 소리입니다. 역도산이 친일파다 아니다란 논의자체가 거북스럽지만, 역도산에 대해 광범위하게 취재를 하고, 증언을 들었던 결과 역도산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란 견해입니다.
 역도산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역도산이 건너간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가 친일파일까요. 만약 지금 일본으로 출장을 갔거나, 여행을 간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일본어를 배워, 그 쪽 구석 구석을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당시 역도산은 15세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 15세는 중학교 2학년생입니다. 그 어린 소년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번쯤 내 동생 형이다 생각하고 떠올려 보십시요.
 그 일본 땅에서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역도산의 대변인도 변명인도 아니지만, 그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38세에 야쿠자 칼에 찔려 숨을 거둔 조선인 역도산을 다시 한번 재평가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조선인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박치기 왕 김일 선생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재일한국인 여건부 선수와 고트네 선수도 있었고, 1958년 동경 아시안 게임때 한국 선수 스폰서도 자처했습니다. 그 뿐입니다.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후원했고, 재일 야구 영웅 장훈 선생도 후원했습니다. 역도산은 재일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한국에 와서 1964년 동경올림픽 지원도 약속했고,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도 약속습니다. 나아가 남북 통일을 위한 통일 전사가 자처했습니다.
 국내서 개봉됐던 영화 <역도산>은 이런 역도산의 본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존 영화가 픽션이 가미됐다고 하지만 이는 역도산을 매도한 영화입니다. 이미 개봉관에서 사라진 영화에 대해 뭐라 비판하기가 때늦은 감은 있지만 김일 선생은 살아 생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도산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진들이 나를 한번도 찾아 온 적이 없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김일 선생만큼 역도산 선생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을까요. 더욱 가관은 그 영화에서 김일 선생은 엔딩에서 나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도산이 칼에 찔린 후 스승님이라며 울부짖는 한 컷 입니다. 실제 상황으로 돌아갈까요. 김일 선생은 당시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서 세계프로레슬링 권좌에 올랐습니다. 또 그 영화를 보면 역도산은 완전 깡패같은 레슬러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 역도산이 화장실 입구서 야쿠자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역도산은 발을 한번 밟힌 이유로 야쿠자를 죽도록 패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노라면, 저라도 생명 방어차원에서 어떤 물체로 역도산의 폭행을 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건 기록을 보면 역도산은 야쿠자 조직원에게 무례하다며 빰 한대를 때렸습니다.
 헌데 영화에선 역도산이 얼마나 잔혹하게 야쿠자 조직원을 폭행합니까. 또 역도산이 아내의 뺨을 때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일본선 제 아무리 역도산이라 해도 아내를 폭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역도산 아내 게이코 여사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이 영화를 보면 감수자가 나옵니다. 그는 재일한국인이자 역도산 마지막 제자인 고트네 입니다.
 그는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 영화 관계자들을 혼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승을 그렇게 엉터리로 묘사할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습니다. 그는 "한국의 영웅 역도산을 한국인이 삼류 양아치로 만들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일본 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인은 역도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 한국인들은 역도산을 삼류로 만들었느냐고요? 이런 질문 받으면 민망합니다.
  이렇듯 역도산은 상업주의와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결합되면서 그의 삶의 업적과 철학, 생애가 철저히 왜곡돼 있습니다.
 12월15일. 이제 4일 남았습니다. 저는 이날만은 니시마고메엔 혼몬지 (本門寺) 묘역에서 외롭게 잠들어 있는 역도산을 마음속으로나마, 추모할 것입니다.  
   

2008/12/11 21:59 2008/12/11 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