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연아, 토리노 망신을 밴쿠버에서
팔라벨라 빙상장에 느닷없는 군가풍의 음악이 흐릅니다.
‘북한의 김연아’를 연상케 하는 표영명(17)이 정용혁(18)의 손을 잡고 은반 위를 미끄러집니다.
2006년 2월 12일. 북한의 피겨스케이팅 페어 쇼트프로그램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토리노의 영광> 다섯 번째 이야기는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에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선수들의 모습을 소개할까 합니다.
당시 피겨스케이팅이 열리는 팔라벨라 빙상장 앞은 암표장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죠.
이탈리아 경비대원의 검문검색도 다른 경기장에 비해 훨씬 심했습니다.
짜증이 날 정도였죠. 그만큼 VIP들이 몰리는 인기 최고의 경기였습니다.
한국도 출전하지 않은 피겨 페어 부문에 북한이 당당히 출전해 세계의 눈길을 끌었죠.
군가를 연상케 하는 음악에 맞춰 나름 깜찍하게 차려입은 표영명과 딱딱한 군복스타일의 정용혁이 어우러져 최선을 다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난이도 높은 기술은 없었고 몇 차례 실수도 있었지만 생소한 예술행위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였죠.
표-정조의 점수와 등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페어 쇼트 출전 팀 중 최하위 점수를 받은 건 기억나네요.
순위나 성적보다 나름 독특한 스타일의 빙상연기를 펼치는 그들이 궁금해 프리스케이팅 경기에 많은 취재진이 모였는데 경기가 열리는 15일, 정작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전날 연습도중 부상을 당해 기권을 선언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죠.
둔필승총도 그들이 프리스케이팅에서는 과연 어떤 음악과 어떤 의상으로 무대에 설까 궁금했는데 너무 허탈했습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선수는 북한의 10대 스포츠 영웅 중 한 명인 김영숙이었습니다.
2004년 트리글라브컵 국제피겨대회 여자개인 우승자인 김영숙은 10일 후 그 장소에서 여자 피겨 쇼트프로그램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진은 훈련 때 모습입니다. 한국 쇼트트랙 취재로 정작 경기는 보지 못했습니다)
연습 때도 낯선 빙판에서 트리플 콤비네이션을 시도하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북한 창작곡〈즐겁게 오라>에 맞춰 은반 위를 날아다녔죠.
결과는 출전선수 29명 중 27위에 그쳐 24위까지만 주어지는 프리스케이팅 출전조차 좌절됐지만 김영숙이 보여준 열정은 너무 뜨거워 빙판을 녹일 정도였습니다.
8년 만에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북한선수단은 아쉽게 ‘노 메달’의 성적을 거뒀지만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개폐회식 남-북한 동시입장은 토리노올림픽의 최대 빅뉴스였죠.
개회식에서 흰색 단복을 입은 채 ‘남녀북남(南女北男)’ 기수인 한국 이보라(20·단국대)와 북한 한정인(28·평양시 체육단)이 맞잡은
대형 한반도기와 이탈리아어로 'COREA' 간판이 스타디오 올림피코를 들어설 때 마구 뛰던 ‘심장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3개월 후 열리는 2010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남북의 김연아가 손을 맞잡고 들어오는 장면을 머리에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