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으면서 쌩뚱맞게 영화 '인터뷰'의 인터뷰 장면이 생각났다.
사랑... 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그 평범해보이는 인터뷰이들은 수줍게 이런 말을 꺼낸다.
"사랑... 나만 이런 걸까. 다른 사람들도 정말 이런 사랑 할까. 아닐 것 같아요"
때로는 습관처럼, 때로는 번개처럼 번쩍 하며 구원처럼 다가오는 사랑.
그리하여 우리는 일생 동안 "사랑밖에 난 몰라"를 노래하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연애를 하고 싶겠죠. 그냥 생활이나 습관이 아닌 연애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인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누구든 나의 사랑만은 특별하다는 오만함이 있어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고 그런 수많은 연인과 우리는 달라. 남들은 다 시시하게 끝나도 우리는 영원할거야.
인간이여 어리석구나. 하지만 그 어리석고 불가사의한 믿음 속에서 드디어 사랑은 시작된다.
주인공 이현은 어느날 문득 어린 시절 단 한 번 맡아본 향긋한 살구즙을 느끼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다.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마음 없음'이다. 그녀는 빙하처럼 차갑고 무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그녀를 다 묘사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심함이었다. 언제나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갓난아이의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이현의 사랑은 특별하다. 그의 사랑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자 경외에 가깝다.
이현은 이진을 아내로 맞기 위해 계약결혼을 한다. 그러나 한 침대를 쓰는 부부가 돼서도 이진은 다가올 듯 다가올 듯 늘 수백개의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처럼 마음의 빗장을 열지 않는다.
결국 이현은 이진이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영혼의 기록 노트를 들춰보게 되고, 그 순간 이진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현은 금기를 어긴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꽉 쥐려 하다가는 화를 면치 못하리라.
경외감과 소유욕 사이에서 위태하게 줄타리기를 하던 이현은, 그렇게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이진은 사라진다.
어리석은 이현. 책을 덮으면서... "이게 진짜 사랑이야"라고 생각해야 할지,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생각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단어들은 꽤 복고적이다. 오죽하면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책도 있겠냐마는.
어쩌면 "난 남과 다르다"며 끝까지 이진을 향해 달려갔던 어리석은 이현의 소유욕.
그게 쿨한 시대의 사랑법에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더 매혹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 사랑은 이제 동경이라기보다는
'믿음'과 '일상'의 문제이지만.
사랑이 들어온 일상은 누구의 것이든 충분히 경외하고, 동경할만 하다고, 또 말하지 못할 것은 없겠지.
중간중간 삽입된, 이진이 기록한 '영혼'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다.

(아래부터는 발췌부분)
p.13
... 나처럼 별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은 당신은 무척 용감한 사람임이 분명해요.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무척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과 유난히 다른 존재를 멀리하고 싶어하니까요. 나의 겉모습만 보고 연애감정을 느낀 사람들도 여럿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모두들 외면했거든요.
p.15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후자 쪽의 사랑은 좀더 희귀하고 벼락같다. 전자 쪽의 사랑만 경험하고서도 신비롭고 벼락 같은 경험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후자 쪽의 사랑을 만나면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인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p.27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그녀를 다 묘사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심함이었다. 언제나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갓난아이의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p.124
이진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시선이 흘러가는길에 서게 된 청년은 핼쑥하게 낯빛이 질려갔다. 북쪽 지방의 어두운 산 사이를 흐르는 조용하고 거대하고 마음이 없는 빙하. 그것에 넋을 빼앗긴 사내는 팔다리가 굳고 숨결이 얼어붙었다.
p.126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결혼해 살면서 이현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졌다.
p.179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무언가 행복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