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젤리피쉬의 소리 없는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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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디자이너의 말처럼 라디오란 '현세의 규칙 너머에 존재하는' 물체인 것이다. 규칙을 무시할 수 있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고 공간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디오다.
 메이비는 라디오를 믿었고, 좋아했다. (무용지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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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사람뿐 아니라 시간을 붙들기도 한다. 아니,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시간을 붙들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가고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멈춘다. 사진은 그렇게 시간과의 달리기에서 계속 뒤처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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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달을 밟고 있으니 예전에 B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물었었다. "어째서 자전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B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뒤로 가지 못하잖아." 나는 B의 이야기를 듣고 푸하하, 웃었다. 내가 "그게 다야?"라고 묻자 B는 "그럼 뭐가 더 필요해?" 라고 되물었다. B가 죽어버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B가 자전거를 좋아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자전거란 인생을 닮아 있었다. 뒤로 갈 수 없는, 뭐랄까, 전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비애랄까, 뭐 그런 게 닮지 않았나 싶다. ...
 페달을 뒤로 밟는다고 해서 자전거가 뒤로 가는 것은 아니다. 뒤로 갈 필요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인생이 아닌가? (바나나 주식회사)
2008/09/07 00:00 2008/09/07 00:00
밑줄 그은 소설 2008/09/07 00:00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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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 Cool!
 인생은 정말 쿨해! 특히, 트렌드의 선봉에 서 있는 패션기자의 인생은 더더욱!
 ..... 과연?

  백영옥의 장편소설 '스타일'은 된장 냄새 폴폴 풍기는 한국형 칙릿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기서의 된장이란,
 남자들이 소위 '페미(페미니스트를 비하해 일컫는 말)'를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로 언급하는 '된장녀'의 된장일 수도 있을테고,
 혹은 그 반대로 한국적인 삶의 냄새가 그대로 풍겨난다는 의미에서의 된장일 수도 있다.

 쿨함보다는,
 패션계와 일터에서의 뜨거운 일상성이 진하게 느껴져서 더 좋았다.

 44를 예찬하지만 정작 스키니진을 못 입어 낑낑대는 여자 주인공과 각자의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 그 기자들의 숨은 이야기와 완벽해보이는 남자들의 여린 면.

 단지, 쿨하도록 솔직한 면이 있다면
 그건 시대가 열광하는 '외면'에 대한 솔직한 변.
 그래, 지금은 내용물보다는 포장이, 페미니스트들이 자기 몸을 사랑하라는 항변보다는 차라리 제니칼로 몸의 지방을 빼내자는 설득이 더 잘 통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여 스타일을 예찬하고,
 달콤한 사탕같은 가십을 유통시키는 이야기는 무엇보다 리얼했다.

 So Hot.
 
 하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 이왕 뜨겁고 지저분한 인생을 보여주려 했다면
 차라리 좀더 리얼하게 렌즈를 들이대는 방식을 쓰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왕자같은, 7년 전 명품 소개팅남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설정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는 구구절절한 변명은 사람들을 모두 착한 사람으로 단숨에 만들어버렸고
 주인공이 자신은 명품에 열광하지만 아프리카의 굶는 아이를 위해서 기부한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장면은 그 주제의식과 상관없이 쌩뚱맞게 나오는 느낌이 강했다.

 뜨거운 인생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식을 빼고, 솔직함을 더하면 이제 한국형 칙릿이 드디어 등장할 때도 머지 않은 듯.

 소설은 드라마와 달라야 한다. 드라마틱하더라도 드라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냥, 그게 제 생각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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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이곳에서 비밀이란 없다. 화장실에서도 말은 냄새처럼 퍼지게 되어 있다. 나쁜 소문일수록 퍼지는 속도는 빠르다. 소문은 변기 안의 지저분한 배설물을 처리하듯 버튼 하나로 간단히 내려버릴 수 없다.

107. 편집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라.
 결국 스테이크보단 제대로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었다.

119.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121. 패션 잡지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건 앞으로 내가 쓸 드라마의 자산이 될 만한 갈등들이야! 이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저런 괴상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겠어. (중략)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것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남들은 고사하고 내 갈등 상황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신은 어떻게 써야 하고 클라이캑스의 갈등은 어떻게 폭발시켜야 할까.
 마지막 엔딩은?

146. 여기에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소문의 제 1법칙이 있다. (중략)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식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중략)
 이곳에선 소문이 늘 사실처럼 유통된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선 신문에서처럼 '바로잡습니다' 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302. 하지만 진짜 연금술이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서 벌어지는 이 놀라운 연애의 장. 이토록 깊은 이해가 이토록 깊은 오해와 절망 위에서 솟아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깊이 안도했다. (중략)
 작은 벌레처럼 온몸을 말고 어둠 속에 떨고 있었을 그 아이가 가여워 나는 그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가여워할 줄 아는 연민일지 모른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331. 어렸을 땐 법정의 에세이 <무소유>를 읽고 감동 받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되물었다.
 "왜 아무것도 소유하면 안돼요? 말도 안돼!"
 인생은 꿋꿋이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소설을 읽고 나선 이렇게 물었다.
 "심심한데 둘이 가면 안 되나?"
2008/07/06 16:54 2008/07/06 16:54
밑줄 그은 소설 2008/07/06 16:54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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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부리고 뒤틀고 벌리고 짓누르는 동안 몸은 오히려 자유를 얻는다. 몸에 휘감기는 조명만이 유일한 온기라는 걸 깨달아야 비로소 풍부한 표정이 나온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다나이드 자세를 마친 여자는 이제 발가벗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스튜디오를 활보한다. 여기에 약간의 환상을 불어넣어 주면 여자의 몸은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리라.

2008/07/03 18:33 2008/07/03 18:33
밑줄 그은 소설 2008/07/03 18:33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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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막에서 육 년을 있었다. 그리고 중동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수가 되었다. 아버지는 백수가 되기 위해 그토록 뜨겁고 지루한 사막을 묵묵히 건너온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도 식빵과 계란 프라이로 허기와 막막함을 채우곤 했다. ...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소금과 설탕을 뿌린 한 장의 식빵! 식빵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얘야. 네가 방금 말이다. 아버지, 하고 부르지 않았냐......?"
 "......"
 "아버지, 하고 부르지 않았냐......?"
 자식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없는 방. 방 한가득 차오르는 본드, 본드냄새. 그건, 어머니가 부업으로 혁띠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 본드, 본드 냄새.
 중동에 나갔던 아버지는 돌아오지만 그가 가지고 온 건 삶의 푸릇푸릇한 향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였다.
 문을 아무리 꼭 닫아도 어디든 들러붙어 숨막히게 가족들을 조이는 그 모래는 쓸쓸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건
 텁텁하게 소금과 설탕이 범벅된 한 장의 식빵,
 내지는 이삿짐보다 모래가 먼저 더 쌓여버리는 트럭이었다.
 
 누가 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나? 누가 내 아비를...?

 그 시대가 그랬다거나
 세월이라거나
 이런 답변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다만, 아이들은 부모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떠밀리듯 어른이 된다.
 그러면서 얼마간 부모를 닮아간다.
 
 마치 소설 속 아비의 아들이 결국 아비의 트럭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2008/06/30 16:15 2008/06/30 16:15
밑줄 그은 소설 2008/06/30 16:15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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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캐스팅. 데드마스크를 뜨듯, 몸의 윤곽을 석고로 뜨는 일.
 이 책은 껍데기인 몸과 사랑, 그리고 상처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사랑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L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아이는 따뜻함과 사랑을 혼동해왔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희미한 쓸쓸함을 느꼈고, 그보다 희미한, 까닭을 알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 그래, 솔직히 말하지. 어느 순간에는, 가끔은,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도 있어. 내가 극도로 냉정하게 느껴질 때. 오래전부터 나는 내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아. 물론 난 타인 역시 믿지 않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거기엔 조건이 있는 거지...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난 뒤에도 그들이 날 좋아할까? 천만에.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없어.

...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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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캐스팅 작가인 주인공과, 너무 많이 먹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여자. 혹은, 폭식과 구토를 반복해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버린 여자. 그녀의 차가운 손.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을 밀어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밀어내고,
 상처를 치유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상처의 껍질 속으로 숨어들죠.
 욕망과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지, 끝없이 묻는 이유. 위악적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독설을 내뱉는 이유. 그건 한번만 더 상처 입는다면 케이오 되고 말 사람들의 억지스런 몸짓이라는 것을. 그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소설의 여자 등장인물들은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게 진실이라면, 그들은 석고로 뜬 조각같은 몸을 통해서라도 증명받고 싶어한다. 물질로 이뤄진 세계에서, 차라리 자신의 몸만은 훌륭한 물질이란 사실을.
 
 실제로 여자의 몸은 언제나 모니터링 당하고 있다.
 그게 찬양이든, 비난이든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몸을 맞추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거나 경멸하며
 결국은 낯선 사람인 양 내가 나를 타인인 듯 바라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종종 생각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뚱뚱해서 나를 떠난 것 아니에요?" "내가 예쁘지 않아서 싫은거죠?" 물론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여분의 살을 혐오스런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의 시선은 여자의 몸을 몸 그대로 인정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마 샤워를 마친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여자는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표준'으로 설정된 사이즈와 몸매 비율에 어느새 자기 자신을 끼워맞추려 하게 된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소름 돋도록 냉정한 한강의 시선은, 알고보면 따뜻하다. (어떤 사람은 그 따뜻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 따뜻함이 그저 "다 잘 될거야"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깊이 이해한 후에 나오는 따뜻함이기에
 한강의 따뜻함은 더욱 믿음직스럽다.

...나는 그녀의 알몸을, 거기 반쯤 포개어진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내 눈이 뜨거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집요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일생의 긴장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움켜쥔 왼손을 끌어다 잡았다. 뿌리치려 하는 손가락들을 하나씩 폈다. ... 마침내 그녀의 자궁에 내 손가락을 넣었을 때, 그녀의 텅 빈 통로는 따스하게 젖어 있었다.
"들어가도 돼?"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외틀었다.
...
"따뜻해."
그녀는 숨차게 속삭였다.
"따뜻한 손이야."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중...

 
그 치유의 이름은 다름아닌 따뜻함.
 결국은 사랑.
 뻔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삶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깊어, 결코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소설.
2008/06/21 16:08 2008/06/21 16:08
밑줄 그은 소설 2008/06/21 16:08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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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으면서 쌩뚱맞게 영화 '인터뷰'의 인터뷰 장면이 생각났다.
 사랑... 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그 평범해보이는 인터뷰이들은 수줍게 이런 말을 꺼낸다.
 "사랑... 나만 이런 걸까. 다른 사람들도 정말 이런 사랑 할까. 아닐 것 같아요"
 
 때로는 습관처럼, 때로는 번개처럼 번쩍 하며 구원처럼 다가오는 사랑.
 그리하여 우리는 일생 동안 "사랑밖에 난 몰라"를 노래하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연애를 하고 싶겠죠. 그냥 생활이나 습관이 아닌 연애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인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누구든 나의 사랑만은 특별하다는 오만함이 있어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고 그런 수많은 연인과 우리는 달라. 남들은 다 시시하게 끝나도 우리는 영원할거야.
 인간이여 어리석구나. 하지만 그 어리석고 불가사의한 믿음 속에서 드디어 사랑은 시작된다.

 주인공 이현은 어느날 문득 어린 시절 단 한 번 맡아본 향긋한 살구즙을 느끼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다.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마음 없음'이다. 그녀는 빙하처럼 차갑고 무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그녀를 다 묘사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심함이었다. 언제나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갓난아이의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이현의 사랑은 특별하다. 그의 사랑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자 경외에 가깝다.
 이현은 이진을 아내로 맞기 위해 계약결혼을 한다. 그러나 한 침대를 쓰는 부부가 돼서도 이진은 다가올 듯 다가올 듯 늘 수백개의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처럼 마음의 빗장을 열지 않는다.
 결국 이현은 이진이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영혼의 기록 노트를 들춰보게 되고, 그 순간 이진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현은 금기를 어긴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꽉 쥐려 하다가는 화를 면치 못하리라.  
 경외감과 소유욕 사이에서 위태하게 줄타리기를 하던 이현은, 그렇게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이진은 사라진다.

 어리석은 이현. 책을 덮으면서... "이게 진짜 사랑이야"라고 생각해야 할지,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생각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단어들은 꽤 복고적이다. 오죽하면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책도 있겠냐마는.
 어쩌면 "난 남과 다르다"며 끝까지 이진을 향해 달려갔던 어리석은 이현의 소유욕.
 그게 쿨한 시대의 사랑법에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더 매혹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 사랑은 이제 동경이라기보다는
 '믿음'과 '일상'의 문제이지만.
 사랑이 들어온 일상은 누구의 것이든 충분히 경외하고, 동경할만 하다고, 또 말하지 못할 것은 없겠지.

 중간중간 삽입된, 이진이 기록한 '영혼'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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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는 발췌부분)
 p.13
 ... 나처럼 별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은 당신은 무척 용감한 사람임이 분명해요.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무척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과 유난히 다른 존재를 멀리하고 싶어하니까요. 나의 겉모습만 보고 연애감정을 느낀 사람들도 여럿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모두들 외면했거든요.

 p.15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후자 쪽의 사랑은 좀더 희귀하고 벼락같다. 전자 쪽의 사랑만 경험하고서도 신비롭고 벼락 같은 경험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후자 쪽의 사랑을 만나면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인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p.27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그녀를 다 묘사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심함이었다. 언제나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갓난아이의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p.124
 이진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시선이 흘러가는길에 서게 된 청년은 핼쑥하게 낯빛이 질려갔다. 북쪽 지방의 어두운 산 사이를 흐르는 조용하고 거대하고 마음이 없는 빙하. 그것에 넋을 빼앗긴 사내는 팔다리가 굳고 숨결이 얼어붙었다.

 p.126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결혼해 살면서 이현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졌다.

p.179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무언가 행복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2008/06/20 14:24 2008/06/20 14:24
밑줄 그은 소설 2008/06/20 14:24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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