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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5 나희덕, '반 통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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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보는 어떤 시기가 있는 것처럼, 하루라는 시간 중에서도 유난히 민감해지고 근원적인 상태가 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름 속에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퀴가 갑자기 멈춘 것 같은 정적이 찾아오는 시간. (일몰무렵)

26
 그러나 그런 생존의 고충이 내게도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나도 밥을 벌기 위해 원고를 써서 팔았고, 빚을 갚기 위해 쓰고 싶지 않은 글까지 써야 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길에서 채소를 팔거나 식당에서 슬리퍼가 닳도록 일하는 게 정직한 노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그것이 생업이 되는 한 감수해야 할 고통이란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또한 삶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일면이 있다. 글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나를 더 열린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갈수록 다른 삶의 가능성이나 근접성을 닫아버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걸 느낀다. 그것은 언뜻 자발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이지 않는 어떤 힘과 질서에 의해 배분된 결과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너무도 쉽게 동의하고 순응한다. 그리고 단 하루의 시간도 거기서 빼내지 못하는 것이다.
28
 몸에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문득문득 마음 한쪽이 굳어져가는 걸 느끼면서, 절뚝거리면서, 그러면서도 남은 반 통의 물을 살아 있는 것들에게 쏟아붓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반 통의 물)

34
 그러나 점자 찍는 일이 아무리 익숙해져도 점자를 손으로 읽는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눈을 뜨고는 점자를 술술 읽을 수 있지만, 막상 눈을 감고 점자 위에 손을 얹으면 내 손끝은 그렇게 무디고 어두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절감했다.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누군가의 어둠을 이해한다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점자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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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들이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갖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을까?" 나는 바슐라르의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중얼거려본다.
 '우리가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갖지 않았더라도 시를 계속 써올 수 있었을까.' 그렇다. 저 새가 집을 짓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일이, 또 시를 쓰는 일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마저 위협받는 시대에 시 쓰는 일의 외로움을 함께 견뎌줄 누군가가 그리웠던 것이다.
 128
 원래 시인의 자리는 주변부니까. 주변부야말로 세상을 눈여겨보기 좋은 자리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끝까지 꿀 수 있는 자리니까.
 .... 검은 나무등걸에서 연초록잎이 돋아나고 있다. 나무는 늙었어도 나무가 내어놓은 잎은 해마다 새 잎이다.
(오래된 내복처럼, 우리는)

 159
 사실 20세기 연표 속에 빼곡하게 들은 내용이란 대부분 전쟁, 혁명,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건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 가장 중요한 일로 선택되면서 일정한 역사적 가공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과 얼마만큼이나 관련되어 있는가. 연표에 요약된 그 숱한 시간들 역시 평범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을 것인데, 이 연표를 만듦으로써 그 하루하루의 의미는 대체 얼마만큼이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로 나는 그 설문에 응답할 수 없었다.
 160
 하지만 삶이란 과연 그렇게 명료하게 정리되거나 요약될 수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기준이 그리도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 그 화려한 연표나 명단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일과 고통, 애환, 신념 들이야말로 시간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 시간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주인들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한 세기가 바뀐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며, 역사라는 거창한 말을 들이댈 만한 그 무엇을 찾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사소해 보이는 하루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도 하다. (연표화할 수 없는 향기)

183
 열여덟살 때 나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서른세살의 나는 기도한다. 나에게 일용할 위험을 주십사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위험함'이 아니라 그 위험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파괴적인가 하는 것이며, 위험함을 건너지 않고서는 진실로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86
 짜라투스트라는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이 아니며, 당신이 복종하거나 머뭇거리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의도하는 어떤 것이다." (니체에 관한 오해)


.................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아이가 있었어요.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기준이 그를 설득시키지 못할 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 아이는 문득 낯선 표정이 되곤 했답니다.

 오늘 일어난 수많은 사건 사고. 그것은 세상을 얼마나 보여주는가?
 오늘 정해진 중요한 정책들. 그것은 나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는가?
 '거시적인 의미에서' 그것들은 분명 중요한 일들이겠죠.
 
 하지만 그 아이는 가끔 질문해 보았어요.
 "삶이란 구체적인 것이 아닐까? 오늘 실연당한 누군가의 눈물. 오늘따라 깊은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는 누군가의 눈꺼풀. 한 번도 본 적 없던 노을빛.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 물기 있던 풀잎들이 말라가며 버석버석거리는 소리와 그 가을냄새. 무엇이 진짜일까?"
 
 그래요.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거죠.
 나의 마음이 충분히 예민할 수 있기를.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게 해주십사... 가 아니라 상처 받는 법을 잊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누군가에게 가만히 빌어보는 거죠.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은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보다
 더 깊은. 그런 것.

 참, 나희덕은 정말 멋진 시인이에요.
2008/09/05 21:05 2008/09/05 21:05
밑줄 그은 책 2008/09/05 21:05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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