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젤리피쉬의 소리 없는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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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캐스팅. 데드마스크를 뜨듯, 몸의 윤곽을 석고로 뜨는 일.
 이 책은 껍데기인 몸과 사랑, 그리고 상처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사랑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L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아이는 따뜻함과 사랑을 혼동해왔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희미한 쓸쓸함을 느꼈고, 그보다 희미한, 까닭을 알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 그래, 솔직히 말하지. 어느 순간에는, 가끔은,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도 있어. 내가 극도로 냉정하게 느껴질 때. 오래전부터 나는 내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아. 물론 난 타인 역시 믿지 않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거기엔 조건이 있는 거지...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난 뒤에도 그들이 날 좋아할까? 천만에.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없어.

...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이프캐스팅 작가인 주인공과, 너무 많이 먹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여자. 혹은, 폭식과 구토를 반복해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버린 여자. 그녀의 차가운 손.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을 밀어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밀어내고,
 상처를 치유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상처의 껍질 속으로 숨어들죠.
 욕망과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지, 끝없이 묻는 이유. 위악적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독설을 내뱉는 이유. 그건 한번만 더 상처 입는다면 케이오 되고 말 사람들의 억지스런 몸짓이라는 것을. 그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소설의 여자 등장인물들은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게 진실이라면, 그들은 석고로 뜬 조각같은 몸을 통해서라도 증명받고 싶어한다. 물질로 이뤄진 세계에서, 차라리 자신의 몸만은 훌륭한 물질이란 사실을.
 
 실제로 여자의 몸은 언제나 모니터링 당하고 있다.
 그게 찬양이든, 비난이든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몸을 맞추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거나 경멸하며
 결국은 낯선 사람인 양 내가 나를 타인인 듯 바라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종종 생각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뚱뚱해서 나를 떠난 것 아니에요?" "내가 예쁘지 않아서 싫은거죠?" 물론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여분의 살을 혐오스런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의 시선은 여자의 몸을 몸 그대로 인정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마 샤워를 마친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여자는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표준'으로 설정된 사이즈와 몸매 비율에 어느새 자기 자신을 끼워맞추려 하게 된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소름 돋도록 냉정한 한강의 시선은, 알고보면 따뜻하다. (어떤 사람은 그 따뜻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 따뜻함이 그저 "다 잘 될거야"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깊이 이해한 후에 나오는 따뜻함이기에
 한강의 따뜻함은 더욱 믿음직스럽다.

...나는 그녀의 알몸을, 거기 반쯤 포개어진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내 눈이 뜨거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집요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일생의 긴장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움켜쥔 왼손을 끌어다 잡았다. 뿌리치려 하는 손가락들을 하나씩 폈다. ... 마침내 그녀의 자궁에 내 손가락을 넣었을 때, 그녀의 텅 빈 통로는 따스하게 젖어 있었다.
"들어가도 돼?"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외틀었다.
...
"따뜻해."
그녀는 숨차게 속삭였다.
"따뜻한 손이야."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중...

 
그 치유의 이름은 다름아닌 따뜻함.
 결국은 사랑.
 뻔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삶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깊어, 결코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소설.
2008/06/21 16:08 2008/06/21 16:08
밑줄 그은 소설 2008/06/21 16:08 by lyc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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