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으는 작은 새, 큰 새를 꿈꾸다
- Posted at 2009/09/1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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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주안초등학교 체육관. 한 50대 주부가 어린 학생들에게 "공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며 배구공을 건네준다. 어린 학생들은 배구공을 발로 차고, 던지고 제멋대로다. 50대 주부는 어린 학생들의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만 있다. "배구공과 친해져야 공의 원리를 알 수 있죠." 
배구계의 전설 조혜정이다. 그의 수식어는 화려하다. '날으는 작은 새', 1970~80년대 배구계의 살아있는 역사.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구기종목 동메달을 선사한 주역.
배구 꿈나무 양성
그는 현재 은퇴한 여자배구 국가대표 모임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부산·인천 등 8개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미래를 짊어질 어린 학생들에게 배구를 가르치고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여자 배구 선수인 후배들의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백인의 여성 체육회'를 추진 중이다. '후배들이 너무 고생 많다'며 내가 특별히 큰 도움을 준 것도 없는데 '고맙다'는 전화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현역 배구선수인 김사니·김연경·황연주 등이 기금모금에 쾌척했다"며 "이들은 백인의 여성 체육회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향해 배구 정신을 강조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배구는 9m의 공간에서 수많은 작전을 만들 수 있다. 빠른 발이 필요하다. 지금 선수들은 과거에 비해 신장·체력·기술이 훨씬 좋은데 끈질긴 면이 떨어진다. 헝그리 정신과 열정, 희생정신이 있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며 "후배들이 정신적으로 좀 더 무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밝혔다.

그가 배구를 시작한 것은 부산봉래초교 6학년 때. "작은 키로는 오른쪽 주포를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중·고교 때 162㎝였는데 다른 선수들은 평균 10㎝는 더 컸다고 했다. 그는 "코트에서 '발악'을 했다"고 말했다. "고교3학년 때 '전승'을 이뤄냈는데도 어렵사리 실업팀에 입단했다. 그 다음해에 비로소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스포츠 가족을 일구다
그가 은퇴 후 20년 만인 지난해 한국배구연맹 경기감독관으로 배구판에 돌아왔다. "코트를 내려다보니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 같다. 경기를 보면 새로운 도전이 싹트는 것을 느낀다"고 돌아온 심정을 밝혔다.
배구코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에게 지난 2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는 "스포츠 가족을 일궈 마냥 행복하다"며 "키가 작아 '발악'했던 시절을 이겨내니 행복이 나에게 밀려왔다"고 했다. 그는 야구인 조창수(전 경북고 야구팀 감독)씨와 결혼해 골프선수인 두 딸을 두고 있다. 자신은 서른다섯의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 체육학과에 입학해 못다 이룬 학업의 꿈을 이뤄다고 했다. "대학원은 중퇴했다. 둘째 딸이 태어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말했다.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던 자신과 달리 두 딸에게는 오랫동안 운동할 수 있는 골프를 추천했다고 했다. "한창 나이에 운동을 그만두니 아쉬웠다. 두 딸이 내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랐다"며 빠른 은퇴를 아쉬워했다.
두 딸은 골프에 재능이 있었다. 첫째 윤희는 KLPGA에서, 둘째 윤지는 KLPGA 2부 투어에서 활동하고 있다. 골프를 하는 두 딸을 위한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무더운 대구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냉면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생각보다 잘됐다. "그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맛있고 장사도 잘됐다"고 했다. 하지만 10여 년 만에 그만두었다. 첫째 딸이 미국 플로리다로 골프 유학을 떠나자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당연히 가게에는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가게를 번창시킬려고 한 장사가 아니어서 욕심은 없었다"고 했다. "두 딸의 골프 캐디가 되고 이탈리아풍 요리를 해주는 등 식단을 짜는 일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현재 두 딸 덕분에 자신도 골프 좀 친다며 머쓱해 하며.

배구는 내 안에 있는 나의 존재
그는 "배구 꿈을 자주 꿨다. 딸의 골프 성적이 안 좋으면 그날 밤 꿈에 스파이크 한 볼이 네트에 걸렸다"며 "배구계를 떠나 있었지만 가슴은 배구를 떠나질 못했던 것 같다. 잠재의식 속에 배구가 늘 살아 있었던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만난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즈음. 가슴속에 품고 있던 포부를 살며시 드러냈다. "배구계 여성 지도자가 되고 싶다. 프로팀 감독도 맡고 싶다. 같은 여성으로 여자선수들의 심리적인 부분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여자 배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후배들의 미래다."
164㎝로 배구코트를 장악했던 날으는 작은 새. 또 한번 여자 배구가 그의 작지만 큰 어깨에 올려져 있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가 펼치는 화려한 날갯짓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9.18.
TIP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일본과의 준결승전.
한국 유경화 세터가 길게 토스 해준 공을 향해 164㎝의 단신 공격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강한 스파이크. 배구공은 그대로 상대편 코트에튕겼다. 장내는 이미 164㎝ 한국선수 오른쪽 주포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이날 한국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조혜정은 이틀 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종아리 근육이 찢어져 일본전은 한 세트밖에 뛰질 못했다. 오른쪽 주포의 부상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그는 "가장 아까운 경기였다. 부상을 당해 경기를 소화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틀 후 헝가리와의 동메달 결정전. 동료들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치료를 받아야 할 다리는 저려 왔지만 통증은 잊어야 했다. 결과는 3:1 역전승. 다들 얼싸안고 환호했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동료 변경자·백명선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육남매 맏이로 동생들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명선이의 음성이 경기 내내 귓전을 맴돌아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자 상대팀 선수들과 언론은 그를 '날으는 작은 새'로 불렀다.
"그때는 다들 어려웠다. 반드시 메달을 따야 했던 이유는 연금을 받아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선수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1978년도 현대코치시절.앞줄 왼쪽부터 이병화,김미연,김영숙,조혜정,김애주(모자)
그 해 10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배구가 마음먹은 대로 안될 때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있는 나의 존재, 배구였다. 지금도 배구공에서 나는 가죽냄새가 좋다"는 그가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프로필
생년월일 1953년 3월 5일
출생지 부산 .
학력 부산 봉래초교-부산여중-숭의여고-수원대 체육학과-수원대학교 대학원(체육학과) 중퇴
가족 조창수씨와의 2녀(윤희·윤지)
신장 164㎝
취미 이탈리아풍 요리
주요경력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2위
1971년 국세청 입단
1972년 뮌헨 올림픽 4위
1973년 대농 입단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2위
멕시코 세계배구선수권 대회 3위
1975년 프레올림픽 금메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위
1977년 현대건설 코치
1979년 이탈리아 안코나 프로팀 입단
1981년 이탈리아 안코나 선수겸 코치
1981년 광주 송원여고 코치
1990년 비치발리볼 사무국장 역임
2008년 한국프로배구 경기 감독관
Posted by yks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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