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명월을 보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청풍명월을 보다.

주말을 이용해 청풍명월의 고장을 다녀왔습니다.

제천을 지나 청풍, 그리고 충주를 도는 호반 국도를 라인으로 정했습니다.

제천은 지형이 험난하고 석회암지역이 많아 살기 힘들다며 올 때는 울고 오는 곳이지만 인심과 자연풍경이 좋아 떠나기 싫어 또 울고 가는 지역입니다.


이미 억새가 가을로 들어서는 입구를 독차지 했습니다.
햇빛에 반사된 저수지를 끼고 한들 바람에 몸을 던지듯 춤추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때로는 하얀 구름이 드리워진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하루아침에 가을옷으로 바꾸어 버리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처할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음력 9 9일이 되면 9마디가 된다고 하여 '구절초(九節草)'라 불리는 야생 들국화도 파란 하늘을 향해 하얀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 높지 않는 해발 500여 고지에 올라 보니 얕은 능선이 지역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듯 합니다.


 충주호(청풍) 일대를 돌아오는 길은 이미 감탄의 연속입니다. 은빛햇살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 앉아 눈 가는 방향으로 계속해 따라 옵니다. 햇살 좋고 포근한 바람이 동반한 날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차 문을 열고 살짝 손을 내밀어 봅니다. 손가락 사이를 가로 지르는 바람의 간지럼이 대단합니다.

청풍대교 가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더군요.


 호반 주위에 듬성듬성 경작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좋은 풍경만 보려 했는데

수몰민의 애환이 서려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나는 길에 들녘을 내려다 봅니다. 고개 숙인 벼의 황금물결과 양배추의 하늘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이색 풍경을 연출했습니다. 파란 배추도 한몫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월악산입니다.

아실분은 다 아시겠지만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누워있는 모습으로 음기가 서려 있는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걸 달래기 위해 근처 절에 남근석을 3개나 심어 놓았다 합니다. 확인은 못했습니다.


 이미 하늘은 밝은 하루를 저무려 합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호수를 보니 또 다른 운치를 더해 줍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작은 낚싯배가 밝은 달을 맞이 한다면 한 움큼 생명이 숨쉬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해 봅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함께한 청풍명월이 가슴에 새겨진 하루입니다.

 

Posted by yks01

2008/09/29 10:14 2008/09/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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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세량지에서 만난 풍경

전남 화순 소재 세량지 가는 길에 만난 풍경입니다.

이곳은 봄이 되면 수십명이 넘는 사진 작가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분주함을 떨면서 반영을 찍는 저수지입니다. 물안개와 활짝 핀 벚꽂이 저수지에 반영돼 그야말로 운치를 더해 주는 곳이지요.



이 곳을 한 낮 내리쬐는 태양을 등지고  9월초 한여름에 찾았습니다.

마을 입구를 보니 외부인의 발걸음이 잦아 이장 허락 하에 문을 열 수 있게끔 문을 닫아 놓았더군요. 마을이장이 없으면 영락없이 1km 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서 가는 게 오히려 더 운치를 더해 줍니다. 양 옆으로는 농작물이 자라고 굴다리를 지나다 보면 귀에 익은 한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입니다. 개울물도 졸졸졸 흐릅니다.


말 그대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처럼 향수 노래(전문있어요)가 나도 모르게 절로 흥얼거리는 곳입니다. 옥의 티이겠지만 한우를 지키는 개 짖는 소리는 장난이 아닙니다. 그 소리는 살짝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굽이굽이 산 비탈길을 오르니 남방노랑나비, 큰줄흰나비 등이 무리를 이룬 채 나뭇가지 위의 수분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저수지를 끼고 있어 습도가 높고 인적이 드문 환경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나비종이 군락을 이루고 있더군요. 나비의 수분 섭취하는 장면은 활동이 많은 수컷나비가 체온을 조절하기 위한 것과 영양분을 보충하는 것 두 개의 학설이 있습니다.



쉬엄쉬엄 뒷짐지고 오른 비탈길 끝에서 고개를 드니 넓지 않은 저수지가 저를 맞이 하고 있습니다. 마치 명소를 찾아 떠나는 이유의 정답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사실 봄에 비하면 그리 운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확 트인 앞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수지 입구에서 한발 더 살짝 발을 디뎌 보니 울창한 숲이 전개됩니다. 밀림 한 가운데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환한 대낮인데도 약간의 두려움이옛날 땔감으로 희생 되었다면 이런 환경도 못 봤을 것입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동행한 이가 궂이 이름을 알라고 하지 마라고 합니다. 야생화는 말 그대로 이름 모를이 앞에 들어가야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해석을 내 놓더군요. 뭐 저도 야생화에 대해 몰라서 그 말에 공감대를 표한다고 했습니다. 몰라서 그런거니 무식하다고 너무 뭐라 하지는 마세요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또한 야생의 소리가 한 가득 들려옵니다. 참새는 짹짹거리며 이방인의 출현을 알리고 있습니다. 장끼 한 마리가 바로 코 앞에서 푸드득 날개짓을 하며 날아갑니다. 소리를 죽인 채 살포시 오르라는 협박처럼 들립니다.

장끼의 협박처럼 숨 죽이고 조용히 다녀 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산비둘기  무리가 전깃줄에 앉아 저희를 배웅합니다.



그렇게 또 남도의 한 끝자락을 소리소문 없이 다녀 왔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참 포근하고 좋습니다. 아늑하구요예전에 미처 못 보던 세상입니다. 떠나보니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등줄기 흐르는 땀도 닦지 않은 채 그 짧은 여행을 기억합니다.



동행한 이의 어록으로 이번 짧은 여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맨날 아스팔트 안에서 똑 같은 일만 하니 배가 나오는 거다. 안에만 있지 말고 틈나는 데로 밖을 보라. 그래야 긴장도 되고 활력도 넘치게 된다고 하더군요.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 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Posted by yks01

2008/09/17 12:24 2008/09/17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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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즈 2008/09/17 19:26 # M/D Reply Permalink

    멋진 사진과 재미있는 글 잘봤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사진 찍을 수 있도록...
    좋은 하루 되세요.

    1. yks01 2008/09/18 11:22# M/DPermalink

      나보다 훨씬 사진 잘 찍던데 뭘.ㅎㅎ

  2. 송원섭 2008/09/18 16:39 # M/D Reply Permalink

    제목 '하순'이 옥의 티구려. 저수지 사진 기가 막힙니다.

    1. yks01 2008/09/18 17:22# M/DPermalink

      고맙습니다.급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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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복서 고(故) 지용주를 아시나요.'
 그는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은메달리스트다. 요즈음에는 금메달리스트가 되어야 집중 조명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은메달이 금메달을 대신했다. 색깔 구분없이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내도 영웅이 됐다.

 지용주는 올림픽에서 성공하기 전만해도 신설된 최경량급에 출전시킨 구색맞추기용 선수였다. 민관식 당시 대한체육회장은 무명에다 키 158cm인 지용주를 보고 “저렇게 작아서야 원”이라고 혀를 찼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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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지용주(가운데) 원주 중.고교 복싱코치 시절  원주 대성 중학교 한 후배 졸업식사진)
 그러나 그는 올림픽에서 1회전 더글러스 오가다(우간다·2회 RSC승), 2회전 빅토르 자포로제츠(소련·3-2 판정승), 3회전 알베르토 모랄레스(멕시코·3-2 판정승)를 연파했고, 4강전에서 스크리자크마저 눌렀다. 10월 28일 결승전에선 베네수엘라의 베테랑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에 선전했지만 아깝게 2-3 판정패로 졌다. 김성집 대표팀 총감독은 뒷날 “3라운드에서 주심이 로드리게스의 버팅을 눈감아줬다”며 아쉬워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후 지용주는 여기저기 높으신 분들에게 불려나갔다. 그들은 온갖 약속을 했다. 하지만 지켜진 게 없었다. 고향 원주 시민들은 지용주의 이름을 딴 체육관을 건립하자고 뜻을 모았다. 지역의 한 정치인이 주동이 됐다. 모금액은 당시 엄청난 가치인 700만 원이 넘었다. 하지만 체육관은 지어지지 못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원주의 원로 체육인 K씨는 “그 돈이 선거자금, 격려금 등등 명목으로 샜다. 지용주의 아버지가 1971년 소송을 걸었다. 확인해보니 150만 원 가량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돌려받지 못했다. 원주 복싱인들도 침묵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이 지용주를 망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믿는다.
 그는 그 때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소주 한 두 잔에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알콜 중독 증상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글러브를 벗지 않았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지용주의 천부적인 파이터 능력을 인정, 선수촌 대신 고향 원주에서 훈련할 수 있게 배려 했으며, 그는 아시안게임 플라이급 금메달로 기대에 부응했다. 1976년 은퇴후 1977년부터 모교 복싱부 코치로 발을 디딘 후 후배를 육성했다. 1979년에는 상경해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팀 코치가 됐다. 그러나 그해 선수 집단이탈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복싱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체육계를 떠난 그를 이용만 했다. 그는 사기를 연속적으로 당했다. 결국 메달리스트의 영광과 환희를 뒤로 한 채 술로 마음을 달랬다. 알콜 중독 증상이 심하자 1975년부터 대한체육회에서 받은 연금(당시 7만 원)에 대해서도 누군가 “주정뱅이에게 연금을 줘선 안 된다”고 투서했을 정도다.
 1985년 지용주에겐 환희와 영광을 뒤로 한 비극이 일어났다. 그해 8월 20일 오후 9시 20분이었다. 지용주는 위아랫집에 사는 사이인 김모씨(당시 40세)와 원주시 태장1동 봉산천 제방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몇 차례 고성이 오가더니 김씨는 집에 들어가 흉기를 가져 왔다. 지용주는 서너 차례 배를 찔린 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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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원주 체육 공원에 세워진 지용주 기념상)
 원주의 영웅은 왜 타락의 길을 걸었을까. K씨는 “지용주가 타락한 건 지도자였던 나, 그리고 원주 시민과 대한민국 체육인 전체의 책임”이라고 탄식했다. 원주체육공원 안에는 1999년 세워진 지용주의 동상이 있다. 지용주 후배 원주 치악복싱체육관 관장 윤봉기씨는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동상을 찾아 살핀다. 동상 옆에 높이 걸린 시계는 고장난 채 10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용주의 인생 시계도 1968년 10월 28일로 멈춰버렸는지 모른다.  기획취재팀 탐사보도=정병철(팀장)·양광삼·최민규 기자 isplus@joongang.co.kr


하계올림픽(1948-2004) 은메달리스트 근황

                                                          <2008년 9월 현재>


이름 연도 대회 종목 세부종목 근황
김성문 1988 서울  레슬링 그레코로만 68kg 개인 사업
김인섭 2000 시드니  레슬링 그레코로만 58kg 삼성생명 코치
김종규 1984 LA  레슬링 자유형 52kg 중국 난징 체육국
김종신 1992 바르셀로나 레슬링 48kg 중국 요령성 체육기술학원
문의제 2000 시드니  레슬링 자유형 76kg 삼성생명 코치
  2004 아테네  레슬링 자유형 84kg  
양현모 1996 애틀랜타  레슬링 82kg 제주도청(현역)
장재성 1996 애틀랜타  레슬링 62kg 대한주택공사 코치
장창선 1964 도쿄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 은퇴, 전 태릉선수촌장
라경민 1996 애틀랜타  배드민턴 혼합복식 캐나다 거주, 주부
손승모 2004 아테네  배드민턴 남자단식 밀양시청(현역)
유용성 2000 시드니  배드민턴 남자복식 수원시청 코치
  2004 아테네  배드민턴 남자복식
이동수 2000 시드니  배드민턴 남자복식 김천시청(현역), 국가대표 코치
  2004 아테네  배드민턴 남자복식
장혜옥 1996 애틀랜타  배드민턴 여자복식 전북은행(현역)
백현만 1988 서울  복싱 헤비급 해외 체류
송순천 1956 멜버른  복싱 밴텀급 대한올림피언협회 회장
안영수 1984 LA  복싱 웰터급 -
이승배 1996 애틀랜타  복싱 라이트헤비급 개인 사업
정신조 1964 도쿄  복싱 밴텀급 경남 충무 거주, 무직
지용주 1968 멕시코시티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작고
강초현 2000 시드니  사격 공기소총 10m 갤러리아(현역)
이보나 2004 아테네  사격 더블트랩 우리은행(현역)
진종오 2004 아테네  사격 50m 권총 KT(현역)
차영철 1988 서울  사격 소구경소총복사 KT 코치
김보람 1996 애틀랜타  양궁 남자단체 두산중공업(현역)
정재헌 1992 바르셀로나 양궁 남자개인 서울시청 플레잉코치
이배영 2004 아테네  역도 69kg 경북개발공사(현역)
장미란 2004 아테네  역도 +75kg 고양시청(현역)
곽대성 1996 애틀랜타  유도 남자 71kg -
김민수 1996 애틀랜타  유도 남자 95kg K-1 선수(현역)
오승립 1972 뮌헨  유도 미들급 오사카 거주
윤현 1992 바르셀로나 유도 남자 60kg 제주 남녕고 교사 겸 유도부 감독
장성호 2004 아테네  유도 100kg 수원시청(현역)
장은경 1976 몬트리올  유도 라이트급 용인대 교수
정부경 2000 시드니  유도 남자 -60kg K-1 선수(현역)
정선용 1996 애틀랜타  유도 여자 56kg 유도 국제심판
조인철 2000 시드니  유도 남자 81kg 용인대 교수
현숙희 1996 애틀랜타  유도 여자 52kg -
황정오 1984 LA  유도 남자 65kg 미국거주, 태권도장 운영
이봉주 1996 애틀랜타  육상 남자마라톤 삼성전자(현역)
김대은 2004 아테네  체조 개인종합 전남도청
여홍철 1996 애틀랜타  체조 남자 도마 경희대 교수
이주형 2000 시드니  체조 평행봉 국가대표 감독
김기택 1988 서울  탁구 남자단식 김기택탁구클럽 운영, 서울대 강사
석은미 2004 아테네  탁구 여자복식 대한항공 코치
이은실 2004 아테네  탁구 여자복식 삼성생명 코치
신준식 2000 시드니  태권도 남자 -68kg 성남서중 코치



* 단체구기종목 및 2008년 대회 메달리스트는 제외.


Posted by yks01

2008/09/15 19:39 2008/09/1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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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주인공보다 더 가난했다. 눈물 젖은 빵, 그 빵이라도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88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7kg 동메달리스트 노경선(46) 씨의 말이다. 그의 삶은 환희, 눈물, 그리고 동메달 리스트로서 겪는 비애나 애환으로 점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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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중학교 시절 함께 자취를 했던 여수 친구들이 일요일 쌀을 가져왔지만 목요일이면 양식이 다 떨어졌다. 친구들 가정도 넉넉치 않아 많은 쌀을 가져 오지 못했다. 그래서 금요일과 토요일 아침은 라면으로 대신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회 출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훈련시간에 들에 나가 양파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손수 쑥을 뜯어와 국을 끓여 먹고 훈련했다. 먹는 것이 시원찮아 달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고 체격도 불지 않아 항상 아쉬웠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면 배고픔 속에서 훈련 했던 과거를 보상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 아흡살때 꿈에 그리던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는 올림픽 영광과 환희 주인공이 되기 위해 피눈물 나게 훈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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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스물 여섯. 마침내 88서울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던 대회 마지막 날 레슬링에서 동메달을 땄다. 너무 기뻐서 메트를 뛰고 또 뛰었다. 시상대에 태극기가 오르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라면만 먹고 훈련했던 배고픈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배고픔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경기 후 TV를 보고 있는데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날 다른 종목에서 금메달이 나와 그 선수만 집중 조명되고 있었다. 나는 동메달이라는 자막만 나오고 경기 장면 한번 나오질 않았다. 너무 서운했다. 배고픔을 참아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언론 보도는 싸늘하기만 했다"며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그는 또 "올림픽 이후 '동메달리스트'로  두 달 정도 주변에서 기억해줬다. 1등만 기억해 주는 세상에서 두 달 정도 세상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 고마운 일이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올림픽 무대는 짧게 환호했고, 짧은 시간에 잊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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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차별이었다. 당시 금메달리스트들은 학교나 실업팀 코칭스태프로 가는 기회가 많았다.  그는 "동메달리스트인 나에게는 단 한번의 제안도 없었다. 연봉에 상관없이 후진 양성에 힘을 보태고 싶었는데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며 상대적인 소외감을 피력했다. 섭섭한 마음을 그는 한마다로 표현했다. "나는 동메달리스트였다."
 그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금메달 도전에 나섰지만 세월의 무게는 그를 더 이상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없게 했다. ‘금메달이라도 땄다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 ’라는 막연한 상상도 했다. 어떤 대표선수도 자신 보다 열심히 훈련하지 않는 선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는 더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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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픈 세월을 벗어 나기 위해 뛰어든 운동이었지만 끝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그는 1993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광주광역시 소재 모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근무중이다. 영세 가정과 독거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주민들의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복지단체와 결연을 맺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손수 보살펴 주는 홈닥터 사업을 진행 중이다. 선수시절 가정이 어려워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획취재팀 탐사보도 yks02@joongang.co.kr

역대 동메달리스트

하계올림픽(1948~2004) 동메달리스트 근황    

                                                         <2008년 9월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