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으는 작은 새, 큰 새를 꿈꾸다

인천광역시 주안초등학교 체육관. 50대 주부가 어린 학생들에게 "공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며 배구공을 건네준다. 어린 학생들은 배구공을 발로 차고, 던지고 제멋대로다. 50대 주부는 어린 학생들의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만 있다. "배구공과 친해져야 공의 원리를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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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계의 전설 조혜정이다. 그의 수식어는 화려하다. '날으는 작은 새', 1970~80년대 배구계의 살아있는 역사.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구기종목 동메달을 선사한 주역.

 배구 꿈나무 양성
그는 현재 은퇴한 여자배구 국가대표 모임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부산·인천 등 8개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미래를 짊어질 어린 학생들에게 배구를 가르치고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여자 배구 선수인 후배들의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백인의 여성 체육회'를 추진 중이다.  '후배들이 너무 고생 많다'며 내가 특별히 큰 도움을 준 것도 없는데 '고맙다'는 전화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현역 배구선수인 김사니·김연경·황연주 등이 기금모금에 쾌척했다" "이들은 백인의 여성 체육회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향해 배구 정신을 강조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배구는 9m의 공간에서 수많은 작전을 만들 수 있다. 빠른 발이 필요하다. 지금 선수들은 과거에 비해 신장·체력·기술이 훨씬 좋은데 끈질긴 면이 떨어진다. 헝그리 정신과 열정, 희생정신이 있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후배들이 정신적으로 좀 더 무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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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배구를 시작한 것은 부산봉래초교 6학년 때. "작은 키로는 오른쪽 주포를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중·고교 때 162㎝였는데 다른 선수들은 평균 10㎝는 더 컸다고 했다. 그는 "코트에서 '발악'을 했다"고 말했다. "고교3학년 때 '전승'을 이뤄냈는데도 어렵사리 실업팀에 입단했다. 그 다음해에 비로소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스포츠 가족을 일구다
그가 은퇴 후 20년 만인 지난해 한국배구연맹 경기감독관으로 배구판에 돌아왔다. "코트를 내려다보니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 같다. 경기를 보면 새로운 도전이 싹트는 것을 느낀다"고 돌아온 심정을 밝혔다.

배구코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에게 지난 2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는 "스포츠 가족을 일궈 마냥 행복하다" "키가 작아 '발악'했던 시절을 이겨내니 행복이 나에게 밀려왔다"고 했다. 그는 야구인 조창수(전 경북고 야구팀 감독)씨와 결혼해 골프선수인 두 딸을 두고 있다. 자신은 서른다섯의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 체육학과에 입학해 못다 이룬 학업의 꿈을 이뤄다고 했다. "대학원은 중퇴했다. 둘째 딸이 태어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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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던 자신과 달리 두 딸에게는 오랫동안 운동할 수 있는 골프를 추천했다고 했다. "한창 나이에 운동을 그만두니 아쉬웠다. 두 딸이 내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랐다"며 빠른 은퇴를 아쉬워했다
두 딸은 골프에 재능이 있었다. 첫째 윤희는 KLPGA에서, 둘째 윤지는 KLPGA 2부 투어에서 활동하고 있다. 골프를 하는 두 딸을 위한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무더운 대구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냉면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생각보다 잘됐다. "그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맛있고 장사도 잘됐다"고 했다. 하지만 10여 년 만에 그만두었다. 첫째 딸이 미국 플로리다로 골프 유학을 떠나자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당연히 가게에는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가게를 번창시킬려고 한 장사가 아니어서 욕심은 없었다"고 했다. "두 딸의 골프 캐디가 되고 이탈리아풍 요리를 해주는 등 식단을 짜는 일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현재 두 딸 덕분에 자신도 골프 좀 친다며 머쓱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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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는 내 안에 있는 나의 존재

  그는  "배구 꿈을 자주 꿨다. 딸의 골프 성적이 안 좋으면 그날 밤 꿈에 스파이크 한 볼이 네트에 걸렸다" "배구계를 떠나 있었지만 가슴은 배구를 떠나질 못했던 것 같다. 잠재의식 속에 배구가 늘 살아 있었던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만난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즈음. 가슴속에 품고 있던 포부를 살며시 드러냈다. "배구계 여성 지도자가 되고 싶다. 프로팀 감독도 맡고 싶다. 같은 여성으로 여자선수들의 심리적인 부분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여자 배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후배들의 미래다."
164
㎝로 배구코트를 장악했던 날으는 작은 새또 한번 여자 배구가 그의 작지만 큰 어깨에 올려져 있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가 펼치는 화려한 날갯짓이 기대되는 순간이다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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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일본과의 준결승전.
한국 유경화 세터가 길게 토스 해준 공을 향해 164㎝의 단신 공격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강한 스파이크. 배구공은 그대로 상대편 코트에튕겼다. 장내는 이미 164㎝ 한국선수 오른쪽 주포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이날 한국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조혜정은 이틀 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종아리 근육이 찢어져 일본전은 한 세트밖에 뛰질 못했다. 오른쪽 주포의 부상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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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조혜정(맨 왼쪽))

그는 "가장 아까운 경기였다. 부상을 당해 경기를 소화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틀 후 헝가리와의 동메달 결정전. 동료들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치료를 받아야 할 다리는 저려 왔지만 통증은 잊어야 했다. 결과는 3:1 역전승. 다들 얼싸안고 환호했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동료 변경자·백명선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육남매 맏이로 동생들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명선이의 음성이 경기 내내 귓전을 맴돌아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자 상대팀 선수들과 언론은 그를 '날으는 작은 새'로 불렀다.
"
그때는 다들 어려웠다. 반드시 메달을 따야 했던 이유는 연금을 받아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선수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1978년도 현대코치시절.앞줄 왼쪽부터 이병화,김미연,김영숙,조혜정,김애주(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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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도 현대코치시절.앞줄 왼쪽부터 이병화,김미연,김영숙,조혜정,김애주(모자))

그 해 10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배구가 마음먹은 대로 안될 때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있는 나의 존재, 배구였다. 지금도 배구공에서 나는 가죽냄새가 좋다"는 그가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프로필
  생년월일 1953년 3월 5일

출생지  부산 .
  학력 부산 봉래초교-부산여중-숭의여고-수원대 체육학과-수원대학교 대학원(체육학과) 중퇴
  가족  조창수씨와의 2녀(윤희·윤지)
  신장 164㎝
  취미 이탈리아풍 요리


주요경력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2위
  1971년 국세청 입단
  1972년 뮌헨 올림픽 4위
  1973년 대농 입단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2위
           멕시코 세계배구선수권 대회 3위
  1975년 프레올림픽 금메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위
  1977년 현대건설 코치
  1979년 이탈리아 안코나 프로팀 입단
  1981년 이탈리아 안코나 선수겸 코치
  1981년 광주 송원여고 코치
  1990년 비치발리볼 사무국장 역임
  2008년 한국프로배구 경기 감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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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균 발효유, 비타민 음료, 그리고 식육사업까지 소비자가 원하는 모든 제품을 만들겠다."
'
소비자가 원한다면'이란 기치로 글로벌 우량기업의 도약을 위한 남우식(57) 푸르밀 대표이사의 인생2막 도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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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대표는 "맨바닥부터 시작했다. 소비자가 무얼 원하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기업이 타격을 입었지만 취임 1년 만에 다시 흑자 회사로 만들었다" "할 수 있다. 현 위기 상황을 극복해 푸르밀 만의 새로운 기업이미지를 심어내겠다. 내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며 당찬 도전을 시작했다.
푸르밀은 유산균 발효유, 유산균 음료, 가공유, 시유 등 유가공 제품생산이 주력이었지만 남 대표의 부임으로 롯데우유에서 푸르밀로 사명을 바꾸고 음료사업과 식육사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남 대표는 "사업을 확장시켜 종합식품회사로 키워나갈 전략" 이라며 "소비자가 원하는 안전하고 건강한 모든 식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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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남 대표는 1970년대 초 경북고야구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초특급 고교투수였다. 한국고교야구 최고스타 '전설적인 투수'가 야구를 그만두고 서른 되던 해 우유회사 말단 영업사원으로 '직업'을 바꿨다. 그 후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28년이 걸렸다.
성공신화다.
남 대표의 성공신화는 고교시절 그의 야구 스타일과 닮았다. 변화구보다 직구를 더 선호했던 그가 CEO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도 '직구'였다. 새로운 도전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정면승부'로 개척해 냈다. 그의 좌우명 '소실대실'이 이를 증명한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면 큰일도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현장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면 큰일도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고 했다.
그는 "처음 영업 할 당시 주위에서는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나 두고 왜 이 길을 가느냐'며 측은해 하기도 했다. 그때 어려움은 말로 표현 못하지만 한 번 결정한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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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에 의한
이어 "현장이 있는 시장이라면 안 다녀본 곳이 없다. 1년 정도 지나니 마케팅과 영업에 대한 나만의 시각을 갖게 됐다" "제조 판매 회사의 중심은 영업이다. 모든 것이 현장에서 이뤄진다. 전국을 다니면서 일일이 시장 파악을 위해 뛰었다"고 했다. 그 말은 누구보다 마케팅 분야에서는 자신 있다는 뜻. 그의 현장 중심 경영은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남 대표는 "건강을 생각한 유산균 발효유에 이어 한국 최초로 12가지 비타민이 들어있는 비타민 음료제품을 개발, 출시했다" "비타민 음료는 소비자의 건강를 생각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는 시장이다. 오늘의 시장과 내일의 시장이 다른 것처럼 경영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에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우유사업도 백색우유를 벗어나 웰빙과 건강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식육사업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식육사업은 올해 1월 시작했다. 현재 월 매출은 30억 정도이지만 내년에는 월 3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도록 뛰겠다"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이어 "영업사원으로 14, 관리직으로 14년을 근무했다. 28년간의 경험은 푸르밀을 이끌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공격적인 마케팅과 함께 강한 도전정신을 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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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를 위한

그는 현 식품시장의 판도를 웰빙과 건강으로 전망했다. 모든 제품을 소비자의 건강을 생각한 기능성 식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남 대표는  "푸르밀은 소비자에게 건강과 식생활개선, 보다 안전하고 신선한 제품을 제공하고자 식품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른 "생산공정별 위해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는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 업무에 대한 표준화 관리인 ISO9001/14001, OHSAS18001(품질.환경 안전보건경영)통합인증을 획득해 품질안정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또한 "친환경 신제품을 개발을 통하여 새로운 식생활 문화와 종합식품회사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아마야구를 호령했던 그에게는 야구공 하나 하나에 인생의 전환점이 있었다. 현재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고생은 말해 무엇하겠냐 마는 그의 바람은 딱 한가지였다. "스포츠를 했던 사람들은 사회에 나와 적응할 수 있는 제도가 극히 미비하다. 제도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야구를 하다 아무 상관없는 영업을 하며 이 자리에 섰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후배들은 나 보다 더 잘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라. 나의 도전은 야구를 하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여기까지 도전할 수 있었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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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를 남기고 영면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 장례는 서거 엿새 만인 23일 국민의 애도 속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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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서울 시청앞)

영결식은 오후 2시 국회 앞마당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 등 유가족과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 여사, 각계대표 및 시민 등 2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습니다.
운구 행렬은 여의도 민주당사와 동교동 사저에 들른 뒤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광장, 서울역을 지나 동작대교를 넘어 오후 450분께 국립 서울현충원에 도착했습니다. 운구 행렬이 지나는 길마다 많은 시민들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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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서울 시청앞)

이희호 여사는 서울광장에서 남편이 평생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평화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라고 대국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번 국장은 1979년 임기중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30년 만입니다. 건국 후 첫 전직 대통령의 예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현충원내 264(80여평) 규모로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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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서울 시청앞)

한편 행정안전부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전국 184개 공식 분향소에서 23일 오후 3시까지 총 696836명이 조문했다고 밝혔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145736, 광주 125905, 전남 188610, 전북 6186, 경기 59633, 부산 17900, 대전 15860, 대구 11190명 등이다. 분향소는 16개 시ㆍ도에 22, 시ㆍ군ㆍ구에 162곳이 설치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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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의 순애보, 김홍일 전 의원의 사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DJ) 23일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의 47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써내려간 편지를 품에 안고 영면했다. 이 여사의 마지막 순애보가 담긴 편지였다. DJ는 이 여사의 사랑이 담긴 마지막 편지와 함게 ‘동행’의 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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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0.사진=서울 사진공동취재단)

자서전인 ‘동행’의 앞 표지 뒷면에 친필로 작성한 ‘이별 편지’였다.
 
이 여사가 자신의 자서전 ‘동행’의 속지에 적어 내려간 편지는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말로 시작된다. 편지에서 이 여사는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을 용서하며 아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라며 남편에게 평생의 고마웠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이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 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 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이 여사의 작별 편지는 그녀의 자서전 ‘동행’과 손수건, 이 여사가 손수 뜨개질해 투병중인 남편의 찬 배를 감싸줬던 덮개, 김 전 대통령이 생전 즐겨보던 성경책과 함께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고인이 잠든 관 속에서 영면하게 됐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당신의 아내 이희호, 2009.8.2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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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김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유가족들과 함께 입장했다. 특히 온 몸의 마비 증상으로 인해 언어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거동도 불편한 상태지만 안간힘을 다해 아버지의 영전에 헌화를 해 주변인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김 전 의원에 영결식과 안장식만 참석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모시겠다며 운구 행렬에 참가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의원은 지난 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당일 오후 의사소통을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했지만 오랫동안 닫혀있던 말문을 열고 "아버지" 3번 불러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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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파킨슨 병을 앓아 평소 말을 거의 못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켜보며 “아..지”라고 세 마디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김 전 대통령측 최경환 비서관은 19일 브리핑에서 “평소 파킨슨병으로 말씀도 못 하시던 분이 임종 순간 만큼은 ‘아버지’라고 세 마디를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 전 의원은 특히 유난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주변에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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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는 김홍일 전 의원.사진=사진공동취재단(2009.8.18).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2002 1.6모습(오른쪽,연합뉴스)



김 전 의원은 지난 18일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임시 빈소가 마련되자 이희호 여사에 이어 휠체어를 탄 채 헌화했다. 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 전 의원은 의정 활동 당시만 해도 통통한 얼굴에 김 전대통령을 닮아 풍채가 좋은 모습이었지만 언론을 통해 살이 빠진 수척한 얼굴이 공개됐다.

김 전 의원은 1972년 공군에 입대해 만기 전역할 만큼 건강에 문제가 없었지만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속돼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고, 당뇨와 고혈압에 파킨슨 병까지 겹쳐 투병해 왔다.

손주영 정치전문가(73)는 “김 전 대통령 빈소에 낯선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있어 처음에는 김 전 의원인 줄 몰랐다. 주변에서 ‘김 전 의원이다’고 말해 인사를 나눴다. 김 전 의원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많은 네티즌들은 안타깝다” “고문 휴유증으로 병을 얻었다”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연민의 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명식 강남세브란스 신경과 교수는 “김 전 의원의 표정에 변화가 없고 상당한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파킨슨 병 증상 중 하나다. 전형적인 파킨슨 병과는 다르지만 눈이 올라가고 입이 벌어지는 모습은 파킨슨 병 증후군인 핵상마비로 보인다. 파킨슨 병의 경우 몸무게가 심하게 차이가 날 수 있다. 호르몬 밸런스가 무너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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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전직 대통령 미망인들의 눈물

 “평생 민주화 동지”라 표현했던 김 전 대통령은 후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먼저 보내야 했다. 그 후 채 100일도 지나지 않는 시점에 김 전 대통령도 후배 대통령을 먼저 떠나 보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거했다. 두 전직 대통령을 떠나 보낸 빈자리엔 이제 홀로 남아있는 미망인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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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공동취재단.2009.08.19)

대통령을 잃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18일 오후 9시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 이희호 여사와 부등켜안고 오열했다. 평생의 동지이자 넘어야 할 경쟁상대이기도 했던 남편들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을까. 홀로 남겨진 이의 동병상련이었을까. 두 미망인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리지 못하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권 여사는 조문에 앞서 북받친 목소리로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픕니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빈소로 들어갔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던 권 여사는 얼마 전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그대로 느끼고 있을 이 여사를 마주 하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부쩍 수척해진 얼굴에 두 줄기 흘러내리는 눈물은 이제 함께 할 동반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 서러운 눈물이었다.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순간들도 많았다.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김 전대통령의 빈소 앞에서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들의 두 미망인이 함께 부등켜 울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울던 두 미망인은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나서야 위로의 대화를 나눴다. 권 여사는 이 여사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겹쳐서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이 여사가 “강해지셔야 한다, 오래 사셔야 한다”며 힘을 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권 여사는 이 여사에세 “죄송하다. 생전에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 여사는 “멀리서 오신 걸 알면 (김 전 대통령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서로의 아픈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까. 10여 분 남짓한 만남 속에 몇 마디 오간 대화는 많지 않았다. 두 전직 대통령만큼이나 ‘정치적 동반자’였던 두 미망인. 민주화라는 열망을 공유하며 같은 듯 다른 듯 먼 길을 돌아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될 두 대통령. 이들 만큼이나 대한민국 전직 두 대통령의 미망인이 부등켜 안고 속절없이 흘린 눈물, 그리고 모든 애증은 죽음 뒤에 그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만 남았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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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가 잡고있던 권양숙 여사의 손, 어제는 이희호 여사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Tracked from moonsoon씨네 블로그 2009/08/19 11:19Delete

    노 대통령 영결식에서 그가 한없이 울던 그 모습입니다. 이 사진, 자꾸 눈물이 나게 합니다. 가슴을 저밉니다. 그가 떠난 어제, 그가 잡고 있던 권양숙 여사의 손이 어제는 이희호 여사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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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1012 2009/08/19 21:25 # M/D Reply Permalink

    미망인 이란말 뜻을 알고 쓰시는건지요? 미망인이란말은 함께 죽지도 못한 살

    아있는 사람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유가족이라 해야 맞을 겁니다..

    1. yks01 2009/08/19 22:54# M/DPermalink

      유가족이 맞습니다.여기서는 남편을 먼저 잃은 아내로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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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지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김대중(85 ·金大中)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 43분 서거했다.

박창일 세브란스 병원장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밝히며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심장이 멎어 심폐소생술은 커다란 의의가 없었다"고 밝혔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삶,수차례 사선을 넘나든 시기를 보내온 ‘인동초’ 삶이 마감된 순간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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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일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께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혈압상승제 등을 이용해 집중 치료를 했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원인은 폐색전증이었다.심하게 손상된 폐때문에 폐동맥이 막혀 호흡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 주요인이다.

박지원 전 비서실장은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홍업· 홍걸, 그리고 손자·손녀들이 임종을 지켜봤다" "믿고 싶지 않는 현실이지만 최선을 다해준 의료진에 고마움을 전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인 김 전대통령의 앞날은 수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남 무안에서 지원유세를 하던 1971 524일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는 김 전 대통령의 앞날을 대변해 주는 고통의 서막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이 일었던 이 사고로 김 전 대통령은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여생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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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퇴임 후 처음으로 찾은  5.18묘역에서)

유신 이래 5년 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78년도에는 6년 반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80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81 1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직선제로 치러진 87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해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 네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97년 네 번째 도전만에 대선에 승리, 98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이끈 공로가 인정돼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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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5일 광주 북구 운정동 5.18국립묘지)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2 4월 과로와 위장장애 등으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했다. 대통령직에서 퇴임 한 2003년엔 관상동맥 확장시술을 받았고 이후 주기적으로 매주 세 차례씩 신장 혈액 투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2005
년에는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 증세 등으로 2차례 입원하는 등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으나,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여전히 건재를 알려 왔다. 지난 5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건강이 악화돼 영결식장에는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다. 이어 지난 6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특별강연을 갖는 등 건강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 했으나 결국 반평생을 괴롭혀 온 육신의 고통을 조용히 내려놓고 영면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25년 전남 신안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 4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다.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97년 대선 도전 네 번째만에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장례절차는 아직 결정되질 않았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년 08.18


 
 - 1924년 전남 하의면 출생
- 1943
목포상고 졸업
- 1946
차용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홍업 두아들
- 1948
목포일보 사장
- 1952
흥국해운 사장
- 1951
한국 해운조합연합회 이사
- 1954 3
대 민의원 선거 목포출마, 낙선
- 1957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 1959 4
대 민의원 재선거 강원도 인제 출마, 낙선
- 1960
민주당 기획위원겸 대변인, 차용애 여사 사망
- 1961
5대 민의원
- 1962
이희호 여사와 결혼
- 1963
6대 국회의원
- 1965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 1967
7대 국회의원
- 1970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희대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 1971
7대 대통령 선거 출마, 낙선, 8대 국회의원
- 1972
일본 동경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망명)
- 1974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 1976-1978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
- 1978
가석방 후 가택연금
- 1979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 1981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
- 1982
미국 망명
- 1983
재미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 1987 4
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 1987 10
월 평화민주당 총재 겸 대통령 후보
- 1988
13대 국회의원
- 1991
신민당 총재
- 1992
14대 국회의원, 14대 대통령 선거 낙선, 정계은퇴 선언
-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 1994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이사장
- 199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7
15대 대통령 당선
- 1998
15대 대통령 취임
- 2000
새천년 민주당 총재, 남북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 2002
새천년 민주당 탈당
- 2003
15대 대통령 퇴임, 김대중도서관 개관
- 2004
내란 음모사건 재심 무죄 선고
- 2006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 2009.8.18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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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입맛도 훌랄라~

“한국인의 입맛에 맞으면 세계 시장에도 통하지 않겠습니까?

훌랄라 참숯바비큐치킨 김병갑 대표(www:hoolala.co.kr)가 외식문화에 대한 새로운 블루오션을 창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국내 토종 치킨 프랜차이즈 훌랄라 참숯바비큐치킨은 독창적인 메뉴·소스와 함께 외식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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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대표는 “현재 훌랄라는 참숯바비큐치킨업계 1·2위를 할 정도로 성장했다”며  1999년 프랜차이즈 시장에 뛰어든 후 10년 만에 670여 개의 가맹점을 확보했다. 예비 창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이템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올 여름 130여 개의 가맹점이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이것은 230여 가지의 치킨 프랜차이즈 시장이 난무한 가운데 올린 성과다
.
김 대표는 “훌랄라는 폐점하는 가맹점이 거의 없다”며 “모든 가맹점주를 ‘가족’으로 대한다”고 했다. “전 재산과 인생을 건 창업자들이다. 그들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한 것이다”고 했다.프랜차이즈는 가맹점주들과의 공동 투자로 그들의 흥망성쇠가 곧 자신과 일치 한다는 것이다.

황제마케팅으로 수익 극대화
 
정상에 선 맛을 봤을까? 아니면 정상에 서 있어서 취할 게 많은 것일까? 프랜차이즈 훌랄라의 안정적인 수입구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업의 다각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새로운 사업 구상은 일명 ‘황제마케팅’이다.  황제 마케팅을 펼치며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황제마케팅은 30평대 내외의 매장의 크기를 100여평 이상으로 넓혀 매출과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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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대표는  “훌랄라의 새로운 가맹점은 이전 매장보다 크고 우아한 레스토랑 형태로 꾸밀 생각이다. 그 지역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현재 매장크기인 99m²(30여 평) 내·외를 330m² (100 여 평) 이상으로 넓혀 매출과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시장조사도 끝냈다. 김 대표는 “최근 직영점을 대상으로 매장 크기를 2배로 늘려보니 매출이 3~4배 정도 뛰었다”며 “대형화와 고급화를 통해 명품 치킨 브랜드를 창출해 내겠다”고 밝혔다.

국산 제품을 이용한 새로운 요리도 계속 개발하겠다고 했다.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건강과 맛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미 훌랄라의 치킨 요리 종류는 30여 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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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요리로 세계무대에 도전

김 대표 사업 구상은 치킨에만 극한하지 않는다. 피자사업을 준비중이며, 패밀리레스토랑과 햄버거 또는 도너츠 체인점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김 대표는  “요리를 직접 해 당일 소화시킬 수 있는 분량만 배송하는 마게팅 전략을 취하겠다”며 다양한 외식문화에 도전의사를 피력했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최근 경기도 양지에 신사옥을 마련했다. 냉동·냉장창고를 갖춘 물류센터도 확보했다. 일대일 맞춤 교육이 가능한 창업지원연구센터도 개설했다. 청결함을 기반으로 한 전자동 시스템으로 음식 가공·유통, 그리고 가맹주들의 교육까지 한 곳에서 처리하겠다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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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대는 세계다. 그는 “한국식 음식과 브랜드로 세계 무대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문 요리사와 함게 고품질의 대한민국 대표음식을 생산해 내 세계무대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브랜드가치가 제품의 가치다. 내가 만든 외식문화의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장기간 계속되는 불황속에서도 그가 오히려 더 공격적인 마게팅을 구사하고 있는 이유다
.
 
김 대표는 “정직한 외식문화는 고객과의 약속이다. 외식문화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대중과의 책임을 신뢰와 양심으로 대신하겠다”며 “국내 고객과의 신뢰가 쌓이면 자연스레 세계 무대를 도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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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산맥! 산악자전거로 넘다.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꿈이고 희망이다.

수많은 능선, 날카로운 암탑과 봉우리, 그리고 만년설.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흰구름과 파란하늘이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어  등산객마다 감탄과 자연의 위대함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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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성)

유럽 중부에 위치, 동쪽의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와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독일을 거쳐 서쪽 프랑스에까지 길이 1200Km, 150~250Km에 달하는 산맥. 그 중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있는 몽블랑 산(4810 m)으로 유럽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으로 알려져 있는 곳. 누구나 꿈꾸는 비경,하지만 험준한 산맥이 기다리고 있는 곳. 바로 알프스 산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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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민대장)

산악자전거로 알프스를 넘는다.

 

알프스 산맥을 넘기 위해 한국의 건아들이 나섰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한국인 알프스 산악자전거 원정대가 대장정에 돌입했다
.
원정대는 김창민(하이델베르크·26)을 대장으로 박희성(20)·유영환(25) 등 독일 유학생 세 명과 하광오(45)·이강세(49)·김선우(38) 등 한국인 현직교사 등 총 6명으로 구성됐다. D 데이는 2.하광오 대원 등 한국인 교사 세 명이 29일 인천공항을 통해 독일로 출발, 독일에 있는 김창민 대장 일행과 합류하면서 7일간의 알프스 크로스 원정대의 첫 페달을 밟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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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유영환·박희성·김창민·김선우·하강우·이강세)


알프스 크로스는 지난 2002 LS전선 구자열 회장과 2007년 한국인 3명이 ‘대회’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독자적으로 원정대를 결성해 스스로 루트를 개발한 개인적 알프스 크로스는 이들이 처음이다. 원정대장 김창민씨와 유학생 유영환씨는 지난해 여름 독일의 알프스 최고봉 추크슈피체(2996m)를 산악자전거로 등정한 알프스 크로스 경험자이다. 김 대장은 광주에서 고교까지 마쳤다.독일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고, 재독 한인자전거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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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강세ㆍ유영환ㆍ박희성ㆍ하광오ㆍ김선우ㆍ김창민)


원정대원들은 인터넷에서 처음 만났다. 김 대장은 "한국인들끼리 알프스 산맥을 넘어보고 싶었다"며 "산악자전거 동호회와 사이트에 '알프스를 산악자전거로 넘자'는 글을 남겼다"고 했다. 산악자전거라면 자신감이 넘쳤던 그들,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알프스를 넘는다는 도전 정신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의기투합한 20~40 6명의 원정대원들은 매일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서로 간의 훈련방법을 공유하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김 대장은 "두 달 전부터 수영·축구등과 하루 50㎞ 넘는 산악라이딩, 100㎞ 넘는 로드로 특별 체력훈련 등을 소화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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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인이다.


원정대는 독일에서 출발해 리히텐슈타인·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알프스 430㎞ 넘는 거리를 횡단한다.
김 대장은 "우리가 가야 할 코스는 해발 최고지점 2843m를 비롯해 2000m 이상 봉우리만도 9개를 넘는 등 가파른 업힐·다운힐의 험준한 코스다. 수백m 낭떠러지를 끼고 달리는 위험성도 감수해야만 한다"며 "15㎞ 동안 42개 구비를 돌며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마의 업힐 구간과 자전거를 메고 암벽 사다리를 오르는 곳도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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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체력과 고난도 자전거 기술, 용기가 필요하다. 알프스 산맥 고산지대의 산소결핍증세도 이겨내야 할 과제다. 김 대장은 “알프스는 연간 독일·프랑스·스위스 등과 각국 익스트림 동호회원들 및 선수들 약 5만여 명이 라이딩을 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 루트는 알프스 크로스의 난이도 중 몇 안 되는 어려운 코스로 누구나 다 가는 길이 아니다. 한국인의 기상과 자긍심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루트는 20년 전 독일인 헤크마이어(Heckmair)가 산악자전거가 일반화 되기 전 자전거로 독일에서 출발해 이탈리아로 넘었던 코스다. 원정대는 그 발자취를 따르는 역사적인 횡보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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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가는 길이라면 도전하지 않았다.

 

김 대장은 “하루 50~90㎞까지 이동한다. 다섯 시간에서 열한 시간이 넘는 강행군 라이딩을 소화해야 한다”며 “알프스 산맥을 자전거를 타고 넘는다는 것은 라이더들에게 극한에 대한 도전이다. 모든 이에게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며 “험준한 지형 때문에 위험이 뒤따르는 알프스 크로스야말로 자기 극복을 위해 도전할 가치가 있는 코스로, 접하는 순간부터 라이더들의 심장을 급격히 요동치게 한다”며 강한 도전의식을 나타냈다. 이어 “알프스 크로스 도중 마주치는 수려한 자연경관들은 알프스 크로스에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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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좀솜지역 묵티나트 지형에서 300km 넘는 라이딩을 한 경력이 있는 하광오 교사는 “충분한 사전조사와 연습으로 도전할 수 있는 몸을 만들었다. 험난한 코스가 많아 힘든 도전이 되겠지만 기회가 온 만큼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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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뮤직을 탄생시킨 염윤정

7년여의 무명세월,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말하는 신인 작가겸 작곡가가 새로운 형태의 문학장르를 탄생시켰다.

작곡한 곡으로 소설을 쓴 미술 다음 시간은 음악’(미다음www.midaeum.com)염윤정(29)스토리뮤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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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음에 수록한 음악 12곡을 작사ㆍ작곡ㆍ편곡까지 도맡아 했다.

“5명의 싱글 앨범과 5편의 단편 이야기가 결합된 형태로 이야기와 음악이 소설의 한 구조 안에서 연결되는 스토리뮤직이다소설과 음악 두 장르가 결합돼 또 다른 표현의 형태를 취했으면 하는 바람이 스토리뮤직 탄생배경이라고 밝혔다.

 

노랫말이 소설로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듯 이미지가 떠오르는 노래, 그 이미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층 구체화 된다. 고대 신선들에게서 시작하여 현재 여자 작곡가의 자전적 이야기까지 5편의 이야기 속에는 음악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있다사랑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음악을 등장시켜 시대와 공간을 넘는 메신저로 사용했다.”

7년의 산고 끝에 색다른 장르를 뿜어냈지만 이 모든 걸 기획한 자신은 한 발짝 멀어선 느낌이다. 공을 신인 뮤지션들에게 돌렸다. 함께한 무명의 신인 가수들이 자신의 곡을 생각대로 아름다운 선율로 소화해 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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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뮤직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2002년 스물세 살의 어느 따사로웠던 하루, 덕수궁에 앉아 첫 곡 연인몽을 구상했다. ‘연인몽은 소설 속 천상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는 일로 가정이 파산일보 직전까지 갔다. 돈 어려운지 모르고 생활했던 지난 날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생활고와 함께 그의 작곡시간도 멀어져 갔다. 그리고 연인몽이후 4년 뒤 비로소 자신이 구상했던 12곡의 곡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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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꿈

곡은 완성 됐지만 무명 작곡가인 그에게 노래를 불러 줄 가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터넷 오디션을 통해 신인 가수들을 공모했다. ‘이심전심이랄까? 오디션에는 노래는 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공모자에게 더 신경을 썼다. 그들과 몇 곡의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음반제작자가 상업화용 음악을 하자는 바람에 마음이 맞지 않아 그들과 헤어졌다. 트롯 가수와 블루스를 부를 가수도 떠났다. 2명의 가수만 남았다. 스물 여덟이 되던 해 또 다른 두 명의 신인 가수가 들어와 4명으로 곡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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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에게 맡길 만한 형편이 안돼 편곡도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트롯 가수를 찾지 못해 마지막 곡 윤정아 라디오 좀 켜라는 직접 불러야 했다. 노래는 마치 동요를 듣는 듯 맑다. 녹음은 끝났지만 음반을 낼 돈이 없었다. 음반을 내 주겠다던 한 음반사가 너무 높은 지분을 요구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음반이 불황이고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쁜 현실이지만 7년을 준비한 작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적지 않는 빚을 내 스스로 출판사와 연예기획사를 설립했다.

곡을 만들고 공연을 하는 동안 가수들 교통비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코디도 없고 매니저도 없었다. 밴 도 없었다. 가수들과의 계약은 5:5였다. 공연을 갖고 난 후 수입금을 가수들과 똑같이 배분했다. 현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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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준비한 작업

시디 쟈켓 디자인과 그림을 그리는 것도 혼자서 해냈다.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기획의도를 이야기 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감당하기 힘든 금액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 사진기자의 도움으로 프로필 사진도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인쇄도 주변에서 도와주어 새로운 형태의 장르가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혼자 할 수 밖에 없던 일들이 많은 경험이 됐다. 새로운 장르가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고 했다.

노래는 철저하게 댄스 풍을 배제했다. 가락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청아하다. 가야금 곡조는 잔잔하다 못해 서글프다. 팝페라ㆍ발라드 풍은 경쾌하다. 블루스ㆍ락 스타일도 있다. 노랫말에는 소설 속 이야기가 함축돼 있다. 하나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푼 메시지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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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곡을 처음 쓰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곡을 써 녹음하여 선물해 주는 것이 좋았다.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작ㆍ편곡을 전공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지난 2000년 한 굴지의 기업 로고 송 공모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빛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졸업 후 한 음악가의 악보사보를 하며 일을 시작했지만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음반 작업도 중지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먼저 알아 준 곳은 아름다운 음악이 필요한 이들과 만나면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기획사 설립 후 갖은 최초의 공연은 한국여성의 집이었다. 성매매와 가정폭력의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어 고봉중고등학교(서울소년원) 공연을 하면서 학교 교가를 작사작곡했다. 정심여자고등학교(안양소년원)에서 엄마의 백합이라는 주제로, 우리들의 쉼자리, 막달레나 공동체, 환경실천연합회 등에서도 공연을 했다. 법무부 보라미 라디오 방송국 가족다큐프로에 자신의 곡이 배경음악으로 전파됐다.그들과 함께 공연을 갖고 노래를 들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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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음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표현하고 싶었고 나만의 독특한 장르의 곡을 쓰고 싶었다작곡이란 가장 외롭지 않게 해주는 부모님과 애인, 친구보다 더 가까운 존재라고 했다.

자신의 곡을 들은 것 같은, 보지 않았지만 본 것 같은 평안함을 주는 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유행에 맞춰 곡을 쓰기 보다는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고 아름다움이 많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도 힘든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한 줌의 위로를 하기 위함이란다. 음반 작업을 하면서 너무 형편없는 실력에 숨어 버리고 싶었던 날도 많았다고.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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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의 백합 - 팝페라

2. 나 보여? - 미디엄발라드

3 드라큘라는 락커였다 - 뮤지컬락

4. 달빛에 마음을 베이고 - 오리엔탈 발라드

5. Mystery - 재즈발라드

6. 윤정아, 라디오 좀 켜라 - 세미트롯

7. 소녀소년 - 발라드+슬로우락

8. - 블루스

9. 사랑아 내가 운다 -팝발라드

10. 안녕, 레코드 가게 - 재즈 동요

11. 연인몽 - 국악가요

12. 얼음아 녹지 마라 - 모던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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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걸 김자인

 열 손가락에 지문이 또렷하지가 않다. 손가락은 수 차례의 골절상으로 인해 마디마디가 튀어 올라와 있다. 손가락 끝은 딱딱하다. 팔 근육은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질 않는 무쇠다. 배에는 왕()자가 새겨져 있다. 발가락은 또 굳은 살이 박히다 못해 오므라들었다. 스포츠 클라이밍(인공암벽등산) 현 여자국가대표 선수인 일명 거미인간 스파이더 걸 김자인(22ㆍ고려대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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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지문이 없어 입국 심사 시 지문을 채취 할 때는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다. 어떤 날은 열 손가락 다 해도 안 나온 날이 있다. 자기 발보다 작은 암벽하를 신는 발은 "핏줄이 발가락 끝으로 모아져 발이 숨쉬는 것조차 두려워할 지경이다. 발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지문과 발가락의 굳은살을 "자랑스러운 영광의 상처"라고 말한다. 그 상처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으니….
지난 4 11, 12. 일본 사이타마현 가조에서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월드컵대회 여자부 볼더링 경기. 152㎝ 신체조건으로 국내 여자선수로는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20여 개국 33명의 출전 선수 중 2위다.
볼더링은 줄을 매지 않고 5m 높이의 암벽을 등반하는데 인공손잡이의 간격이 넓어 체격이 작은 동양 스포츠 클라이머에게는 불리한 종목이다. 출전 선수들의 평균키(163~166)를 감안할 때 김 선수의 키는 스포츠 클라이밍을 하기에는 비교적 작은 키다. 그 작은 키로 준우승을 거두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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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가족.
그가 스포츠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992년 초등학교 2학년 초. "벽에 매달렸는데 10m 높이인 반도 못 갔다. 무서워 다시는 안 하겠다며 매달려 울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피는 속이지 못했나 보다. 가족모두가 스포츠클라이밍을 하니 어느새 자신도 그 세계에 푹 빠졌다. '자인'이라는 이름도 등반가들의 생명줄인 '자일(seil)' ''이고 인은 등반가들의 암벽등반장소로 유명한 북한산 인수봉의 ''이다. 큰 오빠인 자하는 암벽 등반용 쇠못인 '하켄(haken)'. 둘째 자비의 이름은 자일을 묶는 쇠고리 '카라비너(cara biner)'에서 따왔을 정도니 명실공히 등반 가족이다. 두 오빠를 따라 다니며 암벽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두 오빠는 등반의 스승이자 경쟁자가 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정식으로 등반에 도전했다. '등반'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두 오빠가 뒤에서 "열심히 해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18m
의 높이에 오르고 보니 이제는 내려다 보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완등' 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다가섰다. 성취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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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대회는 중학교 2학년 때 안동에서 열린 전국 등반대회이다. 20 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일반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다음해 한국 대표로 프랑스 샤모니 월드컵 대회에 출전했다. 샤모니 대회는 클라이밍 선수들에겐 선망의 대상인 대회다. 하지만 신체 좋은 유럽선수들의 실력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6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한 대회에서 41등으로 예선 탈락했다.
"'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 떠올라 엄청 울었다. 선수 층이 얇은 국내 성적만 믿었던 것이 후회됐다"고 했다. 국내로 돌아와 훈련 강도를 높였다. 강세를 보이는 유럽 선수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훈련 밖에 없었다. 손가락 끝 마디만으로 홀드를 잡고 턱걸이를 하거나 손가락 하나만으로 홀드를 잡고 버텼다. 키가 작아 멀리 있는 홀드를 붙잡기 어려워 더 많은 훈련을 했다. 30개의 루트를 만들어 지정한 홀드만 잡는 훈련을 하다 바닥에 떨어진 경우가 수십 번. "손가락 지문이 없어지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 하나로 턱걸이를 하다 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며 어깨가 빠져 3개월 동안 훈련도 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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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인수봉 바위 암벽을 오르고, 경사가 심한 가파른 암벽을 오르다 미끄러져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2006년 여름 싱가포르 월드컵 대회에서는 연습 중 떨어졌다. 매트리스 사이에 왼발이 빠져 꺾이면서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두 달 정도 치료만 받았지만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이 용서가 안됐다. 깁스를 한 발목으로 10월 등반 경기대회에 출전해 1등을 했다. "답답해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을 거둬 스스로 놀라웠다" 며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의 클라이밍에 대한 악바리 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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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는 좁다
"
클라이밍 자체가 즐겁다. 어느 순간 동반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그가 이제는 세계를 꿈꾼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는 좁다. 각 대륙 1등ㆍ 세계랭킹 1위ㆍ 주최국 1등을 초청, 8명이 참가하는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꿈이다. 2등도 그의 성적을 뒷받침 하지는 못한다. 대회는 4년에 한번씩 열린다. 그 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가 손을 뻗어 잡는 홀드는 인생의 목적지이자 또 다른 이정표요, 길이다. 어떤 홀드를 선택하는지는 그의 몫이다. 그가 잡은 홀드는 곧 그의 인생이다밟고 있는 홀드는 그의 인생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자 후원자다. 허리에 매인 초크백과 자일은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가 한쪽 손으로 홀드를 잡고 나머지 한쪽 손은 초크 백을 만진다. 처음에서 끝으로, 끝에서 처음으로 천천히 옮겨 다니며 등반을 한다. 구렁이 담 넘어가 듯 스르르 진행된다. 이번에는 몸을 잔뜩 움츠리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홀드를 잡는다. 한 손으로 홀드를 잡고 중력을 거슬리는 본능을 찾았는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손을 흔든다. 양광삼의 네모세상.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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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인이 말하는 클라이밍
클라이밍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난이도, 볼더링, 스피드다.
난이도는 자일을 몸에 걸고 16~20m정도 높이의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고 볼더링은 자일 없이 5m 높이를 등반하는 것이다. 스피드는 자일을 하고 13m 이상 높이의 인공암벽을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클라이밍은 저변 확대가 안되어 있다. 심지어 "떨어지면 죽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다치기는 하겠지만 죽는 일은 없다. 내가 클라이밍을 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다. 운동을 억지로 하는 것 보다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이 클라이밍이다. 전신운동으로 살도 빠진다. 지방이 몸에 붙어 있을 여유가 없다. 정상을 완등 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자기 한계를 뛰어 넘는 종목이다. 클라이밍은 어떤 홀드를 잡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지 듯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체적인 근력 향상에 좋고 유연성에도 좋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중국의 헝겊으로 발을 싸매는 전족처럼 신발에 발을 맞춰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지만 곧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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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인 프로필
생년월일: 1988 9 11
신체조건: 15244kg
가족관계: 부ㆍ모 /2 1. 막내
학력: 시흥은행 초-일산동중-일산동고-고려대 체육교육학과 재학( 2학년)
취미: 걷기,지하철 2~3개 코스 정도 거리는 꼭 걸어요
좋아하는 음식:식탐이 있어요.,

<국내외 주요경기 입상실적>
스포츠클라이밍 코리안컵시리즈 랭킹 1(2004 ~ 2008)
2006
년 싱가포르 월드컵 5
아시안 선수권대회 5연패(2004 ~ 2008)
2007 PUURS
월드컵(벨기에) - 난이도 3
2009 KAZO
월드컵(일본) - 볼더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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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9
년 동안 클라이밍을 했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스포츠 클라이밍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홀드를 잡는 느낌이 좋다며. 주 종목은 난이도와 볼더링이고 스피드는 거의 안 한다고 합니다. 저는 김자인 선수와 팔씨름을 했는데 졌지요. 좀 무안해서 왼손으로 다시 시도 했는데 왼손도 졌어요.,. 팔 힘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배 근육을 보여줄 때 보게 됐는데 배꼽에 피어싱을 했습니다. 귀에도 했습니다. 1주일에 주 5, 하루 평균 다섯 시간 정도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대회 이후에는 재학중인 학교 출석을 꼬~옥 한다고 하더군요. 아직 알아봐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유명인은 되기 싫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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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jas 2009/07/31 21:00 # M/D Reply Permalink

    저희 홈페이지로 퍼갑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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